벗을 위한 사랑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에 언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니 부모님의 사랑이 오히려 평가절하 되는 느낌입니다. 특히 모성애는 인류의 가장 강렬하고도 숭고한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벗을 위한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니 쉽게 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요?
부모님의 사랑, 특히 어머니의 사랑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고사에 등장하는 ‘단장’(斷腸)은 자식 잃은 어미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나라 병사들이 양자강을 배타고 가다가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원숭이 어미가 그 배를 좇아 백리를 뒤따라오면서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에 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어미 원숭이는 이내 죽고 말았는데 그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새끼 원숭이를 잡아왔던 병사는 매질을 당하고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이 이러니 살아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또 어떨까요?
펠리컨이라는 새는 덩치가 크고 어미의 사랑이 지극하기로 유명합니다. 여느 동물들처럼 어미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입에 물어다 주는데 새끼들 역시 몸집이 크고 먹성이 좋아 웬만해서는 그 양이 잘 안찬다고 합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구하러 멀리까지도 다녀오지만 먹이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새끼들은 어미 새만 쳐다보면서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치고 먹이를 달라고 떼를 씁니다. 안타까운 어미는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의 가슴을 내어놓는다고 합니다. 새끼들은 정신없이 어미의 가슴을 파먹습니다. 어미가 쓰러지고 그의 깃털에는 붉은 피가 적셔져도 새끼들은 아무 생각 없이 주린 배를 채우는 데 열중합니다. 그리고 어미는 가슴을 뜯기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죽어간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도 이런 어미의 사랑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실 때 어머니의 아픔에 대해서 걱정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벗을 위한 사랑의 위대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벗을 위한 사랑은 선택적입니다. 벗을 위한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니 자기 주도적입니다. 반면에 부모님의 사랑은 다분히 자연적이고 의무적입니다. 부모가 자식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물론, 형편없이 자녀를 괴롭히고 유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천륜을 저버리는 일로 지탄받기에 충분합니다. 벗을 위한 사랑 속에는 본인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기에 자기 결단이 필요합니다.
또한 벗을 위한 사랑은 평등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처럼 내리 사랑이 아닙니다. 같은 입장에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위로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깊은 공감은 입장이 같을 때 일어나는 법입니다.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기에 벗을 위한 사랑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날이 이어지는 가정의 달 5월에 진실한 사랑, 더 위대한 사랑에 대해 돌이켜 보게 됩니다. 의무적이고 의례적인 관계를 돌이켜 보면서 과연 우리는 진실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자녀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위로하는지, 같은 입장에서 공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족의 사랑이 이기주의에 흐르지 않으려면 이러한 사랑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그 순간에도 어린 학생들은 자기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홀로 20여명의 학생들을 구조하고 마지막 구조의 손길을 내미는 학생의 손을 잡아주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자발적인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사랑의 씨앗이 담겨져 있나 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 위대한 사랑이 우리 가정에 흐를 수 있다면 이미 행복의 열매는 풍성하게 채워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 속에 있는 자녀들은 절대로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5월 10일 부활 6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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