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측은지심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싫어서도 아닙니다. 오로지 위험에 빠진 아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서 구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래의 바탕에 측은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이 어짊(仁)의 싹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맹자의 ‘측은지심 인지단야’(惻隱之心 仁之端也)입니다.
언젠가 왕이 대전에 앉아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새로 종을 만들면 짐승의 피를 바르는 의식에 쓰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를 끌고 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럼 이런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은 ‘그런 의식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했습니다. 왕이 소를 양으로 바꾼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왕이 소심해서 또는 이해타산 때문에 작은 동물로 바꾼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죽어가며 부들부들 떠는 소를 보았고, 그 소가 측은하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양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바꾸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좀 쉬려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쫓아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측은하게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즘 같으면 점심시간, 또는 퇴근 시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써 붙이고 되돌려 보내겠습니다만 예수께서는 귀찮게 쫓아오는 이들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이들을 측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많을 때는 누가누군지 구분도 안 되고 상담자와 내담자로 구분하여 집합명사로 만들고 상대방을 대상화 시켜 업무적 관계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지금의 사는 방식이라면 예수께서는 이들 모두가 ‘이웃’이자 사랑의 관계를 맺을 사람들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이 복음의 근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의로움으로 불의를 물리치신 분, 또는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가리는 분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님의 근본적인 마음은 바로 이 측은지심입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 마음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요즘의 우리 사회에서 자주 느끼게 됩니다. 경쟁과 소유 그리고 소비를 목적으로 사는 삶의 자리에서 거리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더군다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쉽게 잊고 삽니다. 세월호 사건이라든지 복지 문제라든지 사회적 이슈에 따라 정치 사회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말하고 법을 말합니다만,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마도 측은한 사람을 측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어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지식을 쌓고 재판을 하고 권력을 행사할 때 여러 사람이 괴로워 할 수 있습니다. 어진 마음이 없이 돈 벌이에 골몰하는 의사가 있다면 사람들은 병원에서 인술이 아닌 ‘돈술’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의로움이 없이 인정만 가지고는 사회가 지탱할 수도 없고 공의가 허물어져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 공동체가 필요하고 공의가 필요한 것도 역시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는 율법적인 도덕과 계율에 익숙한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언행에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듣는 사람의 상황과 맥락과는 상관없이 꾸짖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와 배려가 없이 꾸짖을 때는 상처가 되기 쉽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교회나 공공장소에서 뛰고 떠들 때 나무라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물론 도덕과 계율을 훈련하고 익혀야겠습니다만 어른처럼 침묵하고 정중하게 앉아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그것을 강요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역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먼저 있어서 아이들의 상황을 먼저 이해한 후에 적절한 대안을 마련해 주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것이 쉴 틈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헛걸음치지 않도록 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7월 19일 연중 16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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