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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

by 분당교회 2017. 10. 30.

2017년 10월 29일 연중 30주일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오 22:34-46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주일이네요. “단풍의 가을의 꽃이다. 단풍 꽃을 오래 피우고자 하늘은 비조차 내리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좋은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좋으신 하느님을 예배하러 오신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이라고 표현하니까, 오랜 전 유행했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사람들은 이 가을에 이별을 많이 노래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가을에 결실을 안겨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를 노래합니다. 


다음 주일은 감사로 경배하고 찬양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노트를 작성하고 계신지요? 이 한 주간이라도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하느님의 은총을 돌아보며 감사일지를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는 온 가족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제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서는 창조주 하느님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시는 인생지침서입니다. 사람들은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많은 고통과 아픔이 가득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어떤 질문일까요?


하나는 창세기 3장 9절의 말씀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어떤 맥락에서 이 질문이 나왔는지는 잘 아실 겁니다. 아담이 하느님이 금지하셨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고는 하느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버립니다. 하느님과 아담 사이에 죄의 벽이 가로 놓이며 하느님과 아담 간 사랑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창조의 관계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질문은 4장 9절의 말씀입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카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자 하느님이 카인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형 카인은 동생 아벨를 돌봐야 하는 책임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아우는 약자를 상징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두 가지 질문을 말씀드린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해주신 말씀이 하느님의 질문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마태 22:37-38,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의 예수님 버전입니다. / 39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씀은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의 예수님 버전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일까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배와 순종!”입니다. 개인적으로 드리는 묵상과 기도,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주일 감사성찬예배 등을 통해 하느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먼저 오늘 1독서가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19:9-10, “9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마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마라. 10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놓아라.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분배적 정의’, 쩨테크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레위기 19:15,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마라. 영세민이라고 하여 두둔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봐주지 마라. 이웃을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 사회를 공정하게 세워가는 ‘사법적인 정의’, 미슈파트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레위기가 제시하는 쩨데크와 미수파트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9:8,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이는 우리 성공회 선교정신 3번째, 4번째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3.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의 필요에 응답합니다. 4. 불의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음 주일에 드리는 추수감사예배에 특별히 절기 헌금을 봉헌합니다. 절기 헌금의 취지도 쩨데크입니다. 

신명기 16:10-11,10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려주신 만큼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예물을 바치며 너희 하느님 야훼께 추수절 축제를 올려라. 11 그리고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 즐겨라. 너희는 아들과 딸뿐 아니라 남종과 여종, 또 너희와 한 성문 안에서 사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 있는 떠돌이, 고아, 과부까지도 데리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에서 함께 즐겨라.”


이런 정신에 따라 우리교회는 지난 부활절에 200만원을 푸드뱅크로 플로윙했습니다. 올 해 추수감사절에는 ‘성공회나눔의집’으로 플로윙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 교회 살림이 만만치 않습니다. 주방시설개선과 교회 홍보를 위한 간판 시트지 제작 등에 예산 외의 재정이 소요됩니다. 여러분이 정성껏 봉헌하시면 더 많은 사랑을 흘러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서신을 보면,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지침이 하나 더 나옵니다. 

살전 2:8,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과 이웃 친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사랑으로 섬기는 전도의 삶입니다. 성공회선교정신 첫 번째입니다. 1.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현대에는 이웃의 범위를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까지 확장합니다. 성공회 선교정신 다섯 번째도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5.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며 지구생명의 회복과 유지에 헌신합니다.


이렇듯 쩨데크, 미슈파트, 복음전도, 생태계보호 등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선교의 명령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이웃을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매주일 감사성찬예배를 마칠 때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하며 응답하는 그대로, 여러분 모두 일상 가운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선교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랑의 자원이 너무 미천합니다. 이내 지치고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는 것을 첫 번째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와 순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예배란 하느님과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두었던 눈을 들어 주님의 눈에 눈 맞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도 합니다.


260-1327년 독일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회개하려면 굶거나 맨발로 걷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최상의 참회는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 안에 있든 다른 피조물 안에 있든 간에 하느님 외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엇을 기뻐하든지 그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 가득찰 수 있도록 끊임없는 사랑으로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하느님께 눈을 돌려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의 시작은 하느님을 만나는 구별된 장소와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어느 틈엔가 그 군중을 빠져나와 둘만이 있을 수 있는 한적한 곳을 나가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춥니다. 



연인들처럼, 구별된 장소와 시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과 눈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생활 가운데, 오늘 시편 1편의 고백처럼, 멈추어 주님과 눈 맞추며 주님의 말씀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매 주일 영적으로 참되게 감사성찬예배를 드리면서 성체와 보혈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먹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 삶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젖을 빨고 엄마와 눈을 마주치는 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에게는 그 이상의 행복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눈을 맞출 때 하느님은 행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가 엄마의 눈빛을 통해 사랑을 먹으면서 건강한 인격으로 자라나듯이 우리도 성숙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자연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나누고 정의를 실천하며 환경을 보호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적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파견례의 삶, 하느님이 기뻐 받으시는 일상의 예배입니다. 


시 한편을 읽어드리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사랑하면> 

성지종 신부


사랑하면 듣고 싶지요 

듣는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보고 싶지요 

보는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품고 싶지요 

품는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알고 싶지요 

아는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주고 싶지요 

주는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따르고 싶지요 

따르는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닮고 싶지요 

닮는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함께하고 싶지요 

함께하는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하나 되고 싶지요 

하나인 만큼 사랑하지요


사랑하면 사랑하고 싶지요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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