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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대림 4주일 설교/말씀

by 분당교회 2019. 1. 1.

2018년 12월 23일 대림 4주일 설교/말씀

최성모 요한 신부


은혜로우신 하느님, 성자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은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그 복된 날을 맞이할 때 기쁨으로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게 하소서.


미가 5:1-4상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슬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야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히브 10:5-10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번제물과 속조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당신은 희생제물과 봉헌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쳐지는 것인데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에는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나중 것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것을 폐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루가 1:39-55

며칠 뒤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네 번째 주일이면서, 바로 그 성탄을 이틀 앞둔 날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 성탄대축일은 분명 너무나도 기쁜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 주일학교를 다닐 무렵에 이 맘때면 늘 가슴이 설레이곤 했습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생각하면, 그 어린 나이에도 저절로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나 되돌아보게 됩니다. 부모님 말씀을 너무 안 들은 건 아닌가, 너무 떼쓰고 울기만 한 것은 아닌가, 그렇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성탄밤을 지샜던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성탄밤을 지샜던 이유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특선영화 때문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영화관에 쉽게 드나들 수 없었던 그때, 재밌는 영화를 맘껏 볼 수 있었던 일 년 중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정말 이 날은 우리가 흔히 가족영화라고 부르는 재밌고 마음 따뜻한 영화들을 많이 방영했습니다. ET, 백 투 더 퓨처, 죽은 시인의 사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애들이 줄었어요, 나 홀로 집에 등등. 기억나시죠?


그런데 개중 제가 특히 기다리며 좋아했던 영화는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였습니다. 그중에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건, 1977년작 ‘나자렛 예수’입니다. 우리가 문뜩 떠올리는 예수님의 이미지, 창백한 얼굴, 고뇌에 찬 깊은 두 눈, 마른 몸의 으뜸꼴이라고 할 만한, 그런 예수님이 바로 이 영화에 나옵니다. 예수님 영화는 항상 늦은 시간에 방영했습니다. 보통은 그 시간에 텔레비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부모님도 이날, 이 영화 만큼은 허락해주셨는데,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이 작은 눈꺼풀이었습니다. 늘 꾸벅꾸벅 졸면서 아주 힘들게 예수님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도 쫓아낼 수 없는 그 무서운 졸음이 언제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 장면입니다. 작은 브라운관 안에서 예수님은 붙잡히시고, 고초를 당하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십니다. 어린 저는 연신 눈물을 닦으면서, 예수님을 향해 욕지거리하고, 손찌검을 하고, 심지어 침을 뱉어대며,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외치는, 영화 속 유다인들을 보면서 화를 냈습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냐고 말입니다. 


시간이 훌쩍 흘러 20대 후반이 된 어느 날, 교우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서 저는 어린 시절보다도 더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의 이유는 달랐습니다. 어릴 적 저는 저 자신을 늘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편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저와 상관없다고 여겼던 사람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래서 그분을 아프게 하고,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든 유다인들에게서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군중 속에,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제가, 그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그분을 아프게 했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깨달음에 너무도 서럽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께 따뜻한 방 하나, 깨끗하고 포근한 이불 하나 내어드리지 않았습니다. 청년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에도 다른이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시며 죽으실 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사시고, 어떤 죽임을 당하셨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우리는, 그래서 무작정 그분의 태어나심, 성탄을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절이란, 그저 이천 년 전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서로 잘 알고 친한 친구들끼리 하하호호 웃으며 즐거운 파티를 벌이는 날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가족끼리 모여서 예쁜 케익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날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천 년 전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것은, 여전히 이 세상에 아기 예수님처럼 태어나는 수많은 아기들, 전쟁과 재난의 위험 속에서 귀한 생명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생명들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청년 예수님처럼, 여전히 이 세상에서 차별과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십자가 위 예수님처럼, 여전히 한 생명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 세상에서 스러져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지으셨지만, 사랑받지 못한채 태어나고 자라나는 수많은 아이들과, 하느님의 말씀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수많은 사람들, 사회의 무관심과 부조리로 귀한 생명을 잃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런 단단한 기억의 반석 위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뻐하고, 다시 오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온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로 오시는 하느님 나라를 오롯이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이 거룩한 기다림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슬프지만 그것이,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깨끗한 이불과 따뜻한 방 한 칸 내어드리지 않은 이 세상이 바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육신을 죽임으로써 그분의 이름,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사랑까지 모두 사라지길 바랐던 이 세상의 악한 권세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기는, 사순절기에 못지 않은 묵상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간입니다. 교회 밖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파티를 여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더럽고 누추한 곳에 우리의 눈을 돌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손발을 옮겨야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서가 바로 이 당위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그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번역 루가 복음서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관계를 ‘친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맞는 표현이지만, 친척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συγγενης’를, 저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게 중립적인, 아주 평등하고 실질적인 관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서로 비슷한, 동일한 부류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여인의 만남은 루가 복음서 저자의 의도가 너무나도 확실히 부각된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엘리사벳은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그녀는 아기를 낳지 못한 채 나이가 들어버린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그런 여인은 하느님께 벌을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업신겨김을 당하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또 어떠합니까?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어린 여성이 복중에 태기를 가졌으니, 율법으로는 간음죄고, 형벌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다 결국 돌에 맞아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여인은 세상의 조롱하는 눈빛과 매서운 손가락질에 아무 보호막 없이 던져진 하느님의 백성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두 여인이 만난 것입니다. 


마리아는 태중에 아기를 품고서, 나자렛에서 유다 산골까지 12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 엘리사벳을 만났습니다. 왜일까요? 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핍박당하는 여성, 그러나 율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율법으로 더 큰 고통을 당하는 여성이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와 같이 어려운 사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과 함께하며 손을 맞잡는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일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받아 마리아와 태중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마리아는 기쁨에 넘쳐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비천한 신세를 돌보시는 하느님,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큰일을 해주시는 하느님,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는 하느님,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느님,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대대로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심을 선포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여인, 두 어머니의 만남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작입니다. 두 어머니의 태중에서 함께 기뻐했던 요한과 예수는, 광야에서의 외침으로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열어줄 것이고, 세상의 빛으로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뜻, 그분의 활동이라고 루가 복음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이신지를 잘 알고, 우리가 함께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잘 아는 것은,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아기 예수의 슬픔을, 청년 예수의 아픔을,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의 비극을 멈추는 일입니다. 


교우님들 가슴 깊숙한 곳에 손을 모아 조심스럽게 물어보십시오.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기를 바라는지, 누구나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 말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우리가 얼마나 진심으로 성탄절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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