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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서로 사랑하라!

by 분당교회 2019. 5. 19.

2019년 5월 19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서로 사랑하라!

 

주보 2면에, 가족과 함께 ‘움직이는 평화학교’에 다녀오신 박영빈(미카엘) 교우의 참관기를 실었습니다. 지난 5/5-5/6 일박이일 동안 성공회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에서 주관한 행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평화 감수성과 의식을 함양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잘 읽어보시고 9월에 있게 되는 2차에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어제는 5.18 39주년이었습니다. 5.18은 제 인생을 바꾼 사건 중에 하나이기에 해마다 깊은 의미로 맞이합니다. 올 해는 지난 주 중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이 나오기도 해서 더 큰 슬픔으로 보냈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진실을 바로 규명하지 못한 사건들이 많습니다. 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5.18도 그렇습니다. 우리 후세들이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에 살아 갈 수 있도록, 사건의 실체와 진실들이 바로 규명되어 역사가 바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역사의 주관자 하느님이 살아계시기에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수요일 밤 KBS에서 방영한 ‘플라스틱의 역습’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셨는지요? 보는 내내, 함께 살아가는 피조세계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 문재인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인근 식당에서 청국장으로 점심을 먹는 것을 영상으로 보았는데 거기까지는 소탈한 평소 이미지대로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식사 후 죄다 플라스틱 컵을 들고 걷고 있는데 너무 속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텀블러와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많이 배출하는 배달음식 등은 최대한 자제하며, 생태계 회복과 보전에 헌신해야 합니다. 다음 주일이 환경주일입니다. 특강 강사로 작년에 오셨던 최병성 목사님을 다시 초대했습니다. 그 때 워낙 반응들이 좋으셔서 속편을 부탁드렸습니다. 

 

환경주일 기념으로 오늘 설교 중에 세 번 퀴즈를 낼 건데, 맞추는 분께 텀블러와 장바구니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퀴즈입니다. 작년에 앞 벽면에 걸려 있던 현수막 표어가 무엇이었나요? 

 

“서로 사랑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복음공동체” 맞습니다. ‘교회는 복음공동체이다. 교회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기 위해서는 교회 지체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교회 지체들이 서로 사랑할 때, 오늘 묵시록의 비전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묵시 21:3,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의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존재는 세상에 좋은 소식이 되는 공동체, 복음 공동체가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교회에서 너무나 많이 듣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상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는 깊이 성찰해 봐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여러분 각자에게 “서로”는 누구인지요? 

 

1독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베드로를 이방인 고르넬리오에게 보내어 복음을 전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끼리만 사랑하며 지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복음이 되어야 하는데, “끼리끼리”만 지내고 있으니 그 벽을 깨뜨리며 이방인들을 향해 가게 하신 것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습성이 강합니다. 끼리끼리만 어울리며, 다른 사람들을 따돌리고 왕따 시킵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면 차별하고 배제하며 분열을 초래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선포되는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서로가 끼리끼리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끼리끼리에 익숙하고 새로운 관계를 힘들어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자석처럼 붙어 지내는 끼리끼리를 넘어서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 소수자들, 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계신지요?

 

지난 5월 17일이 한센인의 날이었습니다. 한센인을 사랑하여 소록도에서 오랫동안 섬기신 천주교 강길웅 신부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수사로 수도원에서 수련 중에 있을 때, 함께 사는 수사 지원자 때문에 너무 힘들어 수도원을 뛰쳐나갈 뻔 했다고 합니다. 일거수일투족이 얼마나 자신과 부딪치던지, 그 형제 때문에 수도자의 길을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아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하느님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그 형제는 하느님께서 나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빚으시고자 보내주신 은총의 손길’이라는 깨달음을 주셔서 이후로 그 형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길웅 신부님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서로”가 바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지체였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서로”의 실체입니다. 주일예배 중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인사하는 정도로는, 담소를 나누며 애찬을 함께 하는 정도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서로”에 해당되는 지체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서로”는 누구입니까?

 

두 번째 퀴즈입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언제 하셨나요? 

 

네, 죽으시기 전 날 밤, 최후의 만찬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12제자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유를 오해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혁명으로 로마 제국을 뒤엎으시고 왕의 자리에 등극하실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서로 견주고 시기하고 다투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12제자들 서로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이런 광경은 교회 공동체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함께 지내다 보면 도대체 나랑 맞는 것이 없는 것 같아 힘들기만 합니다.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실제 무례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만 없으면 교회가 천국이겠다 싶습니다. 교회 안에 강길웅 신부님을 힘들게 했던 수도원 동료 같은 사람들이 실재하는 것입니다. 

 

강길웅 신부님은 그런 사람을 불청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불청객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신 신부님은 “내 인생에 원치 않는 불청객은 하느님이 보내신 은총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런 불청객을 겪어오면서 사제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여러분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시키시고자 불청객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만나고 있는 불청객을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사랑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다 성인일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이 계명을 듣고 있는 12제자입니다. 12제자가 서로 어땠다고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제자들이 서로 이렇게 지내고 있을 때, 스승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 자식들 다 내 보내고 쓸 만한 놈들로 다시 불러 하느님 나라 운동이 되겠구나” 생각하실 만합니다. 그런데요. 제가 목회 25년 이상 해보니까 딱히 쓸 만 한 분이 있지 않습니다. 누구나 장단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체들을 보면서, 교회에 나오는 분들이니까 착하고 선하고 거룩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착각때문에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위선적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는 ‘의인으로 인정받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의롭다 인정받아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기 의와 옛 성품으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어떻게 대하십니까? 요한복음 13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넘길 유다에게 빵을 포도주에 적시어 친히 먹여주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을 팔아넘길 제자들인데도 끝까지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 째 퀴즈입니다. 그러면 옛 계명을 무엇입니까? 

 

네. 마태오 22:37-39.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옛 계명을 살아가는 주체가 ‘나’입니다. 내가 사랑의 주체입니다. 내가 말씀을 따라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 계명은 내가 말씀대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 죄인임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며 사랑의 예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 내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님이 다스리는 새 생명이 되어 새 계명이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내 힘으로는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알아가면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성찬례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전심으로 예배가운데 전심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시며 주님의 은총을 갈망하십시오. 성령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성체후기도”를 실제로 살아가는 복음공동체가 되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가 부활의 신비를 나타내는 이 성사를 받았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사랑의 성령으로 채우시고, 그 사랑 속에 한 마음이 되게 하시어, 부활의 기쁨을 항상 누리게 하소서.”

 

잠시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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