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일 여성선교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의 나라를 더욱 풍성하게 하시고자 교회로 여성들을 불러 주셨나이다. 비오니 대한성공회의 여성들이 교회의 선교를 위해서 힘쓰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어느덧 9월 1일입니다. 다음 주면 추석이네요. 이제 곧 추수가 시작될 터인데, 시 한 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손희 시인이 쓰신 “가을의 감사”라는 시입니다.
황금빛 논길 걸으며
한 해의 가을 속에
익은 벼처럼 서 있다는 것
감사할 일입니다
바람 불고
장맛비 내릴 때
뿌리 썩는
고통도 있었지만
병들어 눕지 않고
밥그릇 핥지 않고
삶의 길 묵묵히 걸은 것
하늘이 주신 축복입니다
추수할 것 없어
바구니는 텅 비었지만
살아있어 기도할 수 있다는 것
하늘 우러러 감사합니다.
곡식이 영글어가는 9월 동안 우리의 신앙도 더 깊어지고 영글어가기를 바라며 말씀을 나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예수의 혁명적 선언!
오늘이 여성선교주일이어서 지난 주일에 읽었던 복음을 다시 읽었습니다. 왜 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의 말을 받아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운 선언이 나옵니다. 16절입니다.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개역성경에는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많이 등장하지만, 여자를 향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것이, 당대 유대인들의 사고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배워야만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자에게는 토라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여자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습니다. 여자는 그저 재산 목록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딸을 팔수 있었습니다. 결혼지참금을 받는다는 것은 고상한 표현일 뿐입니다. 심지어 노예로도 팔았습니다. 여자의 위상이 그랬습니다.
이런 배경의 이해로, 18년이나 등이 굽어져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인을 바라보는데 이런 상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여자가 결혼하는 나이가 12-13세인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이 그래도 그때까지는 차별은 받았어도 그리 큰 억압은 없이 살다가, 결혼 정년기가 되니까 아버지가 어떤 아저씨에게 자기를 팔아 큰 충격을 받았고, 그렇게 시집가서 18년 동안 말할 수 없는 차별과 억압 속에서 살게 되면서, 주눅 들고 눌러 지내게 된 것이 아닐까요?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남자와 동등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여자를 재산 목록으로 취급하는 당시의 가치관이, 조선시대 남존여비의 사상이, 오늘날 여성을 성적 유희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사탄이 심어놓은 가치관들입니다.
사탄은 한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 가운데 반성경적인 사상들을 심어놓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이 차별과 배제 가운데 고통 받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딸이다!”라는 선포가 얼마나 혁명적입니까? 여인을 사탄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인권 선언인 것입니다.
지지난 주일 설교 중에 루가복음의 특징 중에 두드러진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다른 루가복음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여성에 대한 관심입니다.
몇 주 전에 읽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루가 10:38-42)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남자 제자들이 스승 앞에서 보이는 모습을 마리아가 보여 준 것이죠.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루가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페미니즘의 선구자고 예수님은 페미니스트였던 것이죠.
초대교회에는 많은 여성 리더십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시대적 문화와 가치관으로 인해 열두제자는 모두 남자로 소개되었지만, 적지 않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리더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바울로의 동역자들이 소개되는데, 가장 먼저 소개되는 사람이 페베입니다. 1절, “켄크레아 교회에서 봉사하는 여교우 페베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3절에 브리스카와 아퀼라가 등장합니다. 부인이름이 앞에 있습니다. 6절에 마리아, 7절에 유니아 등등 많은 여자들이 소개됩니다.
사도 바울로는 오늘 서신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28,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으며 교회 선교의 주역으로 활동했는데, 시대가 흐를수록 퇴행하여 여자들의 권리는 약화되고 홀대 받게 되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똑똑하고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하는 여자들은 마녀라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성직을 비롯한 모든 리더십에 여성들은 배제당한 채,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중후반에 와서야 여성들의 참정권이 보장된 것(직접민주주의로 유명한 스위스도 1971년에야 비로서 여성참정권이 보장되었습니다)을 보면, 초대교회 이후 인류 전체가 얼마나 사탄적인 문화와 가치관에 매여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차별과 억압은 아직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기념하는 교회력으로 예배드리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가끔 특정한 이름이 붙은 주일 - 환경주일, 평화통일주일, 관구주일, 여성주일, 희년주일 등을 맞이하게 됩니다. 환경주일에는 창조질서 회복과 보전을 위해 기도하며 결단하듯이, 이름 자체가 선교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성선교주일도 그렇습니다. 성차별과 성희롱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서, 교회에서 여성이 선교의 주역으로 자리매김 하도록 기도하며 결단하는 날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사회적 약자입니다.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미투 운동은 그동안 여성들이 얼마나 많이 남성들의 폭력에 시달려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성 비하 발언, 성희롱적인 언행들이 난무합니다. 성직자들의 성폭력이 뉴스에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혁명적인 선언이 다시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 평등 시각으로 성경을 보고 사회를 보는 안목이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선교의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는 성가 가사 그대로입니다. 애찬, 바자회, 등 교회의 제반 선교활동에 대부분 여성들이 묵묵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여성들 대부분은 몸으로 수고하는 봉사자로 머물고, 기획하고 결정하는 자리에는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교회의 선교 정책의 결정 구조 - 관구상임위, 교구 상임위, 제반 선교조직들의 구성원들이 거의 남성들입니다. 서울교구 상임위 – 평신도 상임위원 6명, 성직자 상임위원 6명, 주교 이하 스탭 6명, 감사 2명으로 구성되는데 여성은 단 한 명뿐입니다.
여성들 스스로 이 문제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교회 선교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어머니회가 시작된 역사가 그랬습니다. 어머니회는 영국이 자본주의화 되면서 발생한 빈민, 어린이, 여성들의 문제에 주도적으로 응답하는 여성 운동체로서 결성된 것입니다.
이 정신을 계승하는 여성들은 봉사자를 넘어서는 선교의 주체로 우뚝 서야 합니다. 선교를 고민하고 기획하며 결정하는 리더십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교회위원회와 신자회장 사제회장 등에 여성들의 진출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아울러 관구 상임위, 교구 상임위, 제반 논의결정구조에 여성들의 진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 여성의 시각으로 더 세심하게 교회를 보살피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회가 여성들이 선교의 주역으로 존중받고 쓰임 받는 교회로 우뚝 서는 만큼, 한국사회에 희망이 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언을 힘차게 선포합시다.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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