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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주님이 부활하셨도다! 정말로 부활하셨다!

by 분당교회 2020. 4. 12.

2020년 4월 12일 부활대축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마태 28:1-10

 

주님이 부활하셨도다! 정말로 부활하셨다!

 

부활절은 평소 예배에 잘 못 오시던 분들도 오셔서, 시끌벅적 축제로 보내는 대축일인데... 이렇게 텅 빈 성당에서 영상예배를 드리게 되니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그래도 교우 여러분이 각 가정에서, 영적으로 참되게,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계시니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감염 현황이 어느 정도 진정세를 보이고 있어 감사한데...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는 지구촌 곳곳의 소식을 듣자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식을 선포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6년 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도 부활절이었는데,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지 참 힘들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성주간 동안, 릴레이 금식기도하며 올려드렸던 기도를 계속 드리기 원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 생명의 주여! 이 땅을 고쳐주소서. 인류를 구원하소서!” 

 

인류가 역사를 기록할 때 기준점으로 사용하는 것이 B.C와 A.D입니다. B.C는 Before Christ, A.D는 ‘하느님의 해’를 뜻하는 라틴어 Anno Domini 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른 의미로 말하기도 하더군요. Before Corona, After Disease.

 

After Disease. 코로나19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한국근대사와 종교사를 가르치는 옥성득 교수는 코로나19 시대를 전망하며 ‘8가지 탈(벗어남)’과 교회의 ‘4가지 변화’에 대해서 말합니다. 

 

<1탈. ‘탈오리엔탈리즘’입니다. 코로나19 방역에 실패한 선진국 모델로 인해, 이제 서구 우월의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통제와 억압으로 일관한 중국의 국가주의 모델도 실패했습니다.

 

  2탈. ‘탈미국중심주의’입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5천~1억명 사망)과 함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그 왕관(코로나)을 벗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현재 마스크 값이 장난이 아닙니다. 사재기와 총기 구입 등. 게다가 의료장비가 부족하자 중간에서 의료장비를 실은 항공기를 가로채기까지 합니다. 이제껏 한국 개신교인들이 꿈꾸던 ‘아메리카 드림’은 깨어진지 오래지만, 이정도로 나락에 떨어질지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탈미국중심주의, 탈사대주의의 시작입니다(탈친일파도 포함해서).

 

  3탈. ‘탈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에 부각했었죠? 자본의 세계화를 부르짖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기치로 삼습니다. 따라서 국가 권력의 개입을 통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부정하고, 경제적 자유방임주의를 통해 시장의 자연성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이제 코로나19로 인해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신 자급자족형 보호무역주의가 등장 할 것입니다. 그 결과 국가 간 양극화가 더 극심해 질 것입니다. 여우를 피하니 늑대를 만난 격입니다.

 

  4탈. ‘탈유람선 문화’입니다. 일본이 유람선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를 부두에 정박시켜 감염자가 폭증했듯이, 이제 크루즈 유랑은 물론, 레저 신화 자체가 붕괴될 것입니다. 동시에 해외여행이 급감할 것입니다. 성지순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레저 문화는 이제 인간의 내면과 사이버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5탈. ‘탈종교’입니다. 이것은 4가지 변화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6탈. ‘탈중산층 환상’입니다. 중산층의 계층상승의 신화가 붕괴되었습니다. 또한 계층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부의 양극화가 지속될 것입니다.

 

  7탈. ‘탈실버 문화’입니다. 이것은 안락한 노후 신화의 붕괴입니다. 노인들의 건강이 악화될 것이고, 수명이 단축되며 인구가 감소될 것입니다. 바이러스도 주기적으로 출현합니다. 따라서 안락한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향락 문화가 발전할 것입니다.

 

  8탈. ‘탈의료직’입니다.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직이 존경은 받으나, 직업 선호도에서는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4가지 변화(4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변화는 교회가 건물과 공간의 의미에서, 온라인과 시간의 공유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면 주일 성수가 무너집니다.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시간만 공유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건물에 대한 중요성도 떨어져, 교회 건축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됩니다.

 

  두 번째 변화는 구원에 관한 관점 변화입니다. 이제껏 개인과 가족, 개교회 중심의 구원이었다면, 이제 코로나19 이후에는 사회와 환경도 중요해졌습니다. 곧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관심이 확장된 것입니다.

 

  세 번째 변화는 목회 방식의 변화입니다. 기존 행사 위주와 흥행 실적 중시의 목회 방식이 이제는 치유와 건강에 관심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따라서 대형교회 선호와 집단주의가 붕괴되고, 소소한 일상의 신앙이 부각될 것입니다.

 

  네 번째 변화는 영성에 있어서 외면적 행동주의가 아니라, 안식과 평화를 추구하는 내면주의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인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apatheia, 내적인 ‘감정의 기복이 없음’)와 에피쿠로스 쾌락주의 학파의 아타락시아(Ataraxia, 외적 변화에 ‘흔들림 없음’)와 같이, 전쟁과 폭력이라는 외적 위기 상황에 내적으로 침잠하려는 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조로 들립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성공회는 신앙과 교회의 본질를 고민하고 추구해고 있는바, 코로나19 이후 사회의 변화에 그렇게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으로 성공회 선교정신을 더 충실히 실천하는 교회가 된다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주님의 교회로 더 잘 쓰임 받으리라 믿습니다. 이 일에 우리 분당교회가 모범이 되는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읽은 성서에 따라 말씀을 나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부활의 인사부터 다시 나눕니다. 제가 “주님이 부활하셨도다!” 외치면, “정말로 부활하셨도다!”라고 답해 주세요. 주님이 부활하셨도다! 정말로 부활하셨도다!

 

방금 나눈 인사는 기원을 찾자면, 초기교회 몇 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부활절 인사입니다.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은 지금도 이 말로 서로 부활 인사를 나눕니다. 우리도 이 인사를 나누었는데 정말, 지금 나눈 말대로 믿으시는지요?

 

오늘 읽은 2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고르넬리오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만남은 기독교가 유대교 안의 한 종파로 머물지 않고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르넬리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이 좀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전합니다. 39절-40절,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형은 단순히 끔찍하고 처참한 형벌이 아닙니다. 인간 이하의 존재,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 점잖게 죽일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로마 제국이 선언한 극형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에게 나무 십자가는 저주받은 인생이 달리는 가장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죽은 자들은 극도의 수치를 당했고 인류 역사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가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예수가 구원의 이름이라고 전합니다. 오늘 2독서, 사도 10:42-43, “42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43 모든 예언자들도 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물론, 교회 안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말 하지만, “예수는 부활하셨다”는 말은 잘 하지 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하신 걸로 믿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걸로 믿고 기운을 차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나 바울로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라고 말하면,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다른 신앙을 포용하지 못하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근본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이기까지 합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고, 거리를 질질 끌려 다니고, 가장 모멸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군중들에게 조롱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정작 그 스승을 배반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모여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기로 하고, 그것을 희망으로 삼아,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목숨 걸고 전파하는,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방인이라면 상종하지 않는 유다인 베드로가, 이방인, 그것도 자신들을 식민 지배하는 로마제국의 백부장인 고르넬리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그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10:40-41,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마태 28:1,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갔다..... 28:9,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 그 여자들을 향하여 걸어오셔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가까이 가서 그의 두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하였다.” 

 

당시 여자는 증인의 효력을 갖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는데,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증인이 여자들이라고 기록합니다. 사복음서가 다 동일하게 기록합니다. 역사적인 사실, 팩트 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우리도 죽은 사람의 무덤을 보러 갑니다. 고인과 나누었던 친밀감을 느끼고자 가는 것이죠. 사랑의 기억 때문에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이 일어나 걸어 나오길 바라며 무덤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자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주지 못했기에, 다른 복음을 보면, 준비해 두었던 향료를 들고 갔습니다. 다만 돌을 굴려야 예수님의 시신을 볼 수 있고 향료를 발라드릴 수 있으니, 무덤을 지키는 경비원이 자신들의 요청을 들어줄지 걱정하며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마태 28:2-4,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내려와 그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 3 그 천사의 모습은 번개처럼 빛났고 옷은 눈같이 희었다. 4 이 광경을 본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떨다가 까무러쳤다.”

 

진짜 까무러칠 일입니다. 그런데 이 때 천사가 왜 돌을 굴러냈을까요? 무덤 안에 있던 예수님이 나오도록 하려고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여자들이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게 하려고 돌을 굴려낸 것입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무덤이 비어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시체 도난설, 예수 기절설 등으로 빈 무덤이라는 부활의 증거를 덮으려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에 비추어, 예수 부활을 증명할 근거들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5-6절의 천사의 말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5 그 때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6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아라.’”

 

요한이 기록하기를(요한복음 20장), 빈 무덤 안에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적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수건을 잘 개켜 놓고 갈 수는 없는 것이죠.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22:7, “그리고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거기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오.' 하고 알려라. 나는 이 말을 전하러 왔다.”

 

우리가 보는 공동번역에,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표현이 개역성경으로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라고 쓰면 간단한 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길게 썼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부활이라는 단어는 ‘아나스타시스’입니다. 헬라인들은 이 단어를 두 가지 경우로 썼습니다. 하나는 ‘부활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부정을 강조하는 의미로, 그리고 또 하나는 ‘부활이란 현실과는 동떨어진 전설이나 신화 속의 이야기’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아나스타시스라는 단어로 썼다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허황된 전설로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부활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죽은 자’하면 고상하게 들리지만, 헬라어 ‘네크로스’는 ‘시신’, ‘시체’라는 말입니다. 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이 시신이 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거나 전설이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죠.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던 예수님은 실제 죽으시고 시신이 되었습니다. 시체는 끝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시체가 됨과 동시에 막을 내립니다. 그래서 시체는 절망, 체념과 동의어입니다. 모든 곳의 끝남을 의미하는 시체는 형체마저 소멸되는 부패만 있을 뿐입니다.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시신이 되셨다는 것은 그 분의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시신이, 시신이셨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분이 모든 것의 끝남과 절망과 체념의 죽음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그분의 시신이, 시신이셨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강조했던 것이죠. 

 

그분 안에서는 죽음이 끝남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이 아닙니다. 체념이 아닙니다. 새로운 희망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시신이 되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의 육체는 썩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만이 썩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역, 그 모든 것이 썩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원히 살아계신 것처럼, 그 모든 것이 영원토록 계속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그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만나고, 그와 다시 사랑의 교제를 나눈 제자들의 삶은 혁명적으로 변했습니다. 로마 제국과 맞서다 추방당하고, 옥에 갇히고, 죽음을 불사하게 했

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을 절망과 체념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50일간의 부활절기를 지냅니다. 코로나 19로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기간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희망을 보며 기쁨을 맛보려 합니다. 

 

그래서 서울교구는 부활절기를, “기쁨의 50일 - 부활의 영광 속에 성령의 강림을 기대하는 기쁨의 여정”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이렇게 인사합니다. “주께서 부활하셨도다! 정말로 부활하셨도다!” 이 인사가, 진정 나의 고백이고 서로를 향한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희망을 갖고 힘을 얻어,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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