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균형의 영성 & 도우시는 하느님!

by 분당교회 2020. 8. 9.

2020년 8월 9일 가해 19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마태 14:22-33

 

 

1독서 – 바알에게 무릎 꿇지도 않고 입 맞추지도 않았던 ‘남은 자’ 칠천 명처럼, 이 시대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올곧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독서 – 예수님만을 믿고 주님으로 모시고 고백하며 어떤 유혹과 시험에도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 - 균형의 영성 & 도우시는 하느님!

 

 

1.

오늘 복음은 지난주일 오병이어 기적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들입니다. 묵상 중에 여러분에게 와 닿았던 장면이나 말씀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먼저 눈에 들어온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또 예수님이 친히 군중들을 돌려보내시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재촉하다’고 번역된 단어는 ‘강요하다’는 의미를 지닌 강한 어조의 단어입니다. 제자들을 속히 강제로 떠나게 한 것에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그 단서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오병이어를 경험한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 했다는 기록입니다. 군중들의 이런 분위기에 제자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재촉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군중들 역시 강권적으로 흩어 보내신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이 주의 기도 중 이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여러분을 악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는 유혹이 무엇입니까? 

 

분당지역에 돌고 있다는 전단지를 보았습니다. 서현동 110번지에 청년임대 1500세대, 신혼부부임대 1500세대 등 공공임대주택이 들어서는 계획이 있나봅니다. 이것을 반대하는 내용입니다.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는 청년들이 주민의 안전과 치안을 위협할 것이고, 임대아파트 신혼부부들의 자녀들이 기존 분당지역 아이들의 학습권을 방해할 것이니 반대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용서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래서 어린 양이 사자들과 뛰노는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전혀 동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적는데, 오래 전 들었던 말이 기억났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온 중년 여성들이 아파트를 샀는데 프리미엄이 몇 천이 올랐다고 서로 자랑하더라는 말입니다. 

 

아마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과 욕망을 따라, 이토록 반성경적인 선동에 찬동하고 참여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너무 씁쓸하고 속상했습니다. 

 

주보 4면 기도의향대로, ‘주님, 우리가 부동산을 투기 수단으로 삼는 세속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 땅에 성경적 토지정의를 이루어가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자들과 군중을 재촉하며 보내신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이곳으로 왔던 원래 계획대로,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시어 날이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홀로 계셨습니다. 

 

‘홀로 있음’, 고독, SOLITUDE는 타자로부터의 소외가 아닌 자발적 소외입니다. ‘거기에 홀로 있음’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하고만 함께 있음’입니다. 

 

지난 몇 주일, 저는 계속 여러분에게 기도와 묵상을 강조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렉시오 디비나, 복음관상기도, 향심기도 등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와 묵상이 여러분에게 신앙의 의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의무감으로 기도하는 율법적인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하고만 함께 하는 시간이 참된 안식과 위로, 삶의 회복이라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어, 기도와 묵상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축복임을 알게 되고, 그 은총을 풍요롭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으로 보이신 ‘하느님하고만 함께 있는 홀로 있음’은 세상 속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이 시간이 없었다면, 죄인과 병자들의 친구로 살아가신 삶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저는 오병이어 기적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홀로 있음 못지않게 병자를 고치고 군중을 먹이는 섬김과 사역도 중요한 하느님의 일임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처형당한 소식을 듣고 기도하고자 한적한 곳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원래의 계획인 기도를 미루고 치유하시고 먹이시는 사역에 집중하셨습니다. 

 

예배, 기도, 묵상만이 영적이고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 특히 우리의 삶을 위해 직장에서 하는 일들, 가사 노동, 공부 등도 중요한 하느님의 일인 것이죠.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저희 셋째 매형이 오랫동안 맹인복지선교회를 운영하셨었습니다. 그런데 직원 한 분이 자주 지각하고 근무 시간에 그렇게 졸더랍니다. 그분이 다니면 교회에 매일 심야기도회를 있었고 그 직원분이 매일 심야기도회에 참석했던 것이죠. 기도회에 참석함으로 더 성실하고 탁월하게 일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각하고 근무 시간에 존다면, 심야기도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덕스럽습니다. 

 

다만,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 가운데 내가 하는 세상일들을 하느님의 마음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오롯이 잘 감당하기 위해서, ‘홀로 있음 - 하느님하고만 함께 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 사건 후에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며칠 전, 저희 교회 교우님이 페이스 북을 올리신 사진과 글을 보며 마음이 기뻤습니다. 진짜 열심히 일 하시는데, 잠시 멈추어 영적독서의 시간을 갖는 사진을 올리신 겁니다. 

서울주교좌성당이나 예수원에서는 아침 7시, 정오, 저녁 6시에 종을 칩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잠시 멈추어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삼종기도하고 하죠.

 

여러분의 삶에도 이 삼종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핸드폰에 알람 설정을 해 놓고,  단 1분만이라도 멈추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하고만 홀로 있는 시간으로 여러분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면, 1분이 5분이 되고 10분이 될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이야기 예수님을 통해, 일상과 기도의 균형, 굳건히 나아감과 지긋이 물러남의 균형, 바로 이 균형의 영성을 배웁니다. 

 

균형의 영성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세상 속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매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2.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호수 건너편으로 가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역풍을 만나 고생했습니다. 역풍이 일어나는 바다란 구약의 전통에서 즉음과 혼돈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욥기 이사야서 등에서 바다는 사탄이 살고 있는 거처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마태오복음 8장에서 바다를 제압하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경험했습니다. 8장에서는 배 안에서 잠을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이 풍랑을 제압하셨었습니다. 하지만 14장에서는, 예수님이 배에 함께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부재의 상황입니다.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역풍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는 초대 교회를 연상시킵니다. 물론 세상 속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신 시간이 새벽 4시라고 하니, 제자들은 밤새도록 역풍이 부는 바다에서 시달린 것입니다. 이렇게 역풍으로 고통 중에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보면,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상황을 다 아시는 주님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주님입니다. 

 

새벽 4시에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쩔쩔매는 혼돈과 죽음의 세력을 밟고 오셨습니다. 기도 중에 낙심하지 말 것은 주님은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도우시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를 보고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소리칩니다. 바다가 악한 영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더 겁에 질렸을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나다”라는 말은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I am who I am. 나는 나다.” “나는 지금 너와 함께 하고 있는 하느님이다.”라는 말입니다.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주권자이시고 영광스럽고 사랑 자체이신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이 말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베드로가 소리칩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렇다면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고 싶은 갈망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혼란과 무질서를 이기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오너라”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물을 밟고 걸어갑니다. 하지만, 이내 베드로의 눈에 예수님보다는 거센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물에 빠져버립니다. 예수님은 ‘살려 달라’ 외치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인생 여정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로는 오늘 서신에서 말씀합니다. 로마 10: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리라.”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베드로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의심을 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베드로가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물 위를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 믿음을 무너뜨린 것이 의심입니다. ‘의심’이라는 말의 원어는 ‘디스타제인’으로 “나누어진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나누어진 마음은 두려움에서 온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이 아닌 바람이 이는 바다를 봤을 때 두려움이 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고정되지 않으면, 의심이 들어와 믿음이 무너집니다. 우리의 삶은 혼돈과 무질서라는 바다에 빠져 버립니다. 

 

투명한 유리판 위를 아기가 기어가는 실험을 했습니다. 아기는 바닥이 환히 보이는 유리판을 기어가지 못합니다. 유리판 건너편에 엄마를 서있게 했습니다. 아기가 엄마를 보는 순간, 엄마만을 바라보며 기어갑니다. 

 

균형의 영성으로 살아가십시오.

그 무엇보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 한 말씀 읽어드리며 설교를 마칩니다.

히브 12: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