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0일 가해 22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 16장 21절-28절
우리나라가 참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코로나 방역조치 2.5단계 조치가 실시됩니다. 자영업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실로 크다고 합니다. 어제 교우님과 문자 주고받는데, “오프라인 매장은 다 죽음이에요.”라는 글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의사들과 정부의 대치가 강대강으로 치달아 걱정입니다. 고향 친구 의사에게 물어보면 파업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대학 시절 기독학생회 동기 의사에게 물어보면, 정부 방침에 문제가 있어도 그래도 파업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대화와 타협으로 잘 해결되기를 기도합니다.
8.15 광화문 집회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그분들 중에 적지 않은 분들이 코로나 검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예수 이름으로 부자 되기를 기도하고, 예수 이름으로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름을 바꾸려고 한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지난주일 말씀에,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눈 장소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라는 도시입니다. 분봉왕 헤로데 필립보가 로마 황제를 위해 도시를 세웠다면,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비전 선포입니다.
퀴즈 하나 풀고 가시죠.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되려면 필요한 3가지 “대”가 있는데, 무엇이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교회는 대조, 대항체, 대안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전을 선포하신 후,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입니다. 마태 16: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
이 말씀에 나오는 ‘원로들, 대사제들, 율법학자들’은 산헤드린 의회를 말합니다. 71명의 산헤드린 의회는 로마 제국의 허락 하에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의회와 법원의 기능을 하는 자치기구입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에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누리던 지배계급들이었습니다.
그 구성이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반반입니다. 다들 하느님을 최고로 잘 섬긴다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하느님을 잘 섬긴다는 목사들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오늘날의 현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 중에 “반드시”라는 표현을 주목해 봅니다. 왜 반드시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펼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 차별과 배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환대하시고 식탁의 교제를 나누면서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으로 공고히 유지되던 기존 질서를 균열시켰고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죽일 모의를 시작했습니다. 마태 12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종교 지도자들을 규합하고 로마 제국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오복음 9장을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신랑이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을 잘 섬긴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일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희생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죄라고 합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독생성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인간을 대신하는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 그분의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여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 베드로가 나서서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하며 ‘말리었습니다.” ‘말리었다.’는 말이 원어로는 ‘꾸짖다’는 뜻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끌고 가서 꾸짖으며 말했다는 겁니다. “아니 예수님,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걸까요? 스승 예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지난주일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니까 예수님이 다른 데 가서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인즉 유대인들은 그리스도하면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로마 제국을 몰아내는 혁명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런 메시아로 여기고 따라왔던 겁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 이면에 예수가 왕 위에 오른다면 우리도 한 자리씩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자기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공통된 입장이었습니다.
마태오복음 20장 20절, 21절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청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엇인가를 청할 양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다.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은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민족적 열망과 자신들의 욕망으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는데, 예수가 죽으면 지난 3년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의 행동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23절,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습니다.”
바로 직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주님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라고 칭찬받았는데, 지금은 주님의 길을 가로 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가”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갈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는 일입니다. 필립보가 로마 황제를 위해서 도시를 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하듯이, 제자들도 이스라엘의 재건이라는 대의명분 하에 자신들의 출세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성명하자면,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에 따르면, 로마 제국을 뒤엎는 혁명을 일으켜 승리해야 다윗의 통일 왕국 때와 같은 이스라엘 재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당시 로마제국이 보여주는 통치 메카니즘과 동일한 것입니다.
로마의 통치 메카니즘이란 황제를 숭배하는 제국의 신학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하여 평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칼과 힘‘으로 이룬 로마 시민들만이 누리는 팍스 로마나입니다. 이를 도식화 하면, “제국의 신학 – 전쟁 – 승리 – 평화”입니다.
이 제국의 통치 메카니즘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맘몬 제국의 질서인 피라미드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기며, 남을 누르고 짓밟으며 올라갑니다. 도식화 하면, “맘몬이즘 – 약육강식, 적자생존 – 성공 – 행복”이 됩니다.
이런 것이 사탄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사탄은 어떤 악한 영적 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제국의 질서에 동의하고 그 가치관에 따라 살며 그 속에서 자신만의 성공과 행복을 위하야 살아갈 때,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 나라를 방해하는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삶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 - 비폭력 - 공평과 정의 - 평화”입니다. 이를 우리 삶으로 적용하면, “하느님 나라 복음 - 공평과 정의 - 섬김과 나눔 - 평화 생명을 누리는 삶”이 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려면,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 제국의 질서를 따르던 옛 자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 옛 자아가 유혹하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럴 때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생명 있는 삶이 됩니다.
육체적인 생명보다 더 소중한 진정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25-26절을 말씀하신 겁니다. 25-26, 25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뿐만 아니라, 심판주로 다시 오실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참 생명을 소망하는 사람은 육체적 생명이 허락되는 동안 잠시 누리는 이 세상의 신기루와 같은 영화를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사탄의 부르심과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이중 부르심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오늘 1독서에서 이집트 제국의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느님, ‘나는 나다’ ‘나는 지금도 너와 함께 하고 계신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 자들은 그분의 나라, 하느님 나라를 비전으로 품으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결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말씀/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 용서! (0) | 2020.09.13 |
---|---|
여성선교주일 (0) | 2020.09.06 |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0) | 2020.08.23 |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는 참된 믿음! (0) | 2020.08.16 |
균형의 영성 & 도우시는 하느님! (0) | 2020.08.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