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일 연중 31주일
(모든 성인의 날)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 5:1-12
교회의 절기인 할로인 데이 때문에 방역 방국이 초비상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탄절 전야를 크리스마스 이브 축제로 보내듯이, “All Hallows’ Day evening“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전야가 세상 축제가 된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만추의 계절, 오늘 모든 성인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또 내일은 모든 별세자의 날입니다. 푸르고 싱싱하던 나뭇잎이 낙엽으로 떨어지는 이 때, 주님은 모든 성인의 날, 모든 별세자의 날을 기념하며 낙엽처럼 사라져 갈 우리 인생을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 2독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의 종착점이 어디인가를 말해 줍니다. 1요한 3: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신앙 여정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성품과 인격을 지닌 존재로 성숙하고 변화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목적 때문에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내신 것이죠.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 3주일까지 영성체 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성자 예수를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과 경건의 삶의 모본으로 이 땅에 보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삶의 발자취를 인내로서 따르게 하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다간 사람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1독서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서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분들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삼습니다. 이들을 본 받아 우리도 천국에서 주님 앞에 서서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름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악한 아합 왕과 맞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며 거짓 예언자들을 무찌른 영웅적인 예언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으로 도망가 숨기도 했던 연약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엘리야가 좋습니다. 연약한 저이지만, 하느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성마르코 성당입니다. 마르코는 바울로와 함께 전도여행을 다녔던 선교사이며, 복음서를 최초로 기록한 제자입니다. 그래서 분당 교회는 복음 위에 굳건히 서서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선교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들도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교회 안에 본을 붙여 주셨습니다. 신앙이 자라나기 위해서 성서 묵상과 기도는 기본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지체들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신앙이 건강해 집니다. 지체들의 본을 보면서 신앙을 배우고 자라나게 됩니다.
저에게는 수원교회가 그런 공동체입니다. 전도사 부제 사제로 5년의 보좌생활을 하는 동안 당시 수원교회 관할사제셨던 박경조 프란시스 주교님 옆에서 보고 배우며 사목자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개척했던 제자교회도 그렇습니다. 동역했던 평신도 리더가 진짜 존경스러웠습니다. ‘내가 신자라면 저렇게 교회를 섬길 수 있을까’ 감동할 정도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분당교회가 여러분 각자에게 그런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서로서로가 존경하며 겸손히 배우는 가운데 함께 성장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그럴만한 좋은 신자들이십니다. 누구는 이런 점에서 누구는 저런 점에서 본받을 만 하다고 말씀드리면 쑥쓰러워 하실까봐, 분당교회 별세자 몇 분 이야기를 좀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식 안드레아라는 교우가 계십니다. 제가 부임하기 전 돌아가신 분입니다. 부임해서 보니 분당교회 교우들이 많이 그리워하시더군요. 부임한 첫 해 교우들과 속초에 가서 추모예배를 드렸었죠. 이분의 공식학력이 국졸이라고 들었습니다. 고아로 가난한 곱사등 장애인이셨습니다. 그런데 분당교회 교인이 되어 한 몸을 이루며 가족처럼 지내셨습니다. 객관적으로 분당교회는 중산층 고학력자가 많은 교회입니다. 안드레아님이 신앙으로 당당한 삶을 사셨다는 겁니다. 또 분당교회는 그분으로 인해 교회의 참모습을 좀 경험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누구나 와서 가족이 되는 공동체니까요. 안드레아님은 불편한 몸으로 지하에 있는 성당을 제습하는 일이나 청소하는 일 등 교회를 돌보는 일에 섬김을 다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부임하고는 김웅호 안토니오님, 송준영 그레고리님이 별세하셨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네요. 세월이 참 빠릅니다.
안토니오님은 제가 부임했을 때 이미 항암 치료 중이셨습니다. 제가 부임미사 드린 날 저녁 식사에 초대하셔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두 주마다 2박 3일씩 들어가시어 그 독한 약물 치료를 받으셨는데도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셨지요. 애찬을 못하신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건강이 괜찮으셨을 때는 교우들의 친교와 교회의 활성화를 위해서 여러모로 애쓰시며 힘든 뒷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는 이곳에서 그레고리님의 2주기 추모성찬례를 드렸습니다. 제가 송회장님을 만난 건 8-9년 전 교구 선교위원회에서였습니다. 당시 선교위원장이셨는데 제가 성공회에서 만난 평신도 리더십 중에 그레고리 회장님만큼 성공회 교단 전체와 교회에 대한 애정을 가지신 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수시로 강화를 오가시며 “꿈꾸는 강화”라는 프로젝트를 만드시고 그 비전을 나누셨는데, 지금에야 그 꿈이 강화교무구에서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또 성공회를 알리고 싶으셔서 자비로 기금을 조성하시어 조충연 교우, 윤지상 교우와 함께 사업을 구상하고 진행하기도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브랜든선교연구소 초대이사장을 맡으시며 선교를 위해 고민하는 사제들과 평신도 리더들을 이끌어 주셨지요.
두 분 모두,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오늘 1독서 말씀대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가 되어 생명의 샘터로 인도해 주시고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며 안식을 누리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을 맞이하여, 각자 신명으로 모신 성인들을 본받고 또 하느님께서 성공회분당교회로 보내주셨던 지안드레, 김안토니오, 송그레고리 교우들을 기억하며 본 받아 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성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성서는 우리 모두를 성도라고 부르지요 그러니 우리 각자는 성인입니다. 우리를 성도로, 나를 성인으로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기대는 우리가 실제 성인의 삶을 살며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인이 살아가는 행복한 삶의 지침이 오늘 복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복음 팔복을 싫어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죠. 성인들은 이 팔복을 살고 누린 분들입니다. 성인으로 부름받은 우리도 살게 되는 삶이 팔복입니다. 한 절 한 절 살펴보겠습니다.
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은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가난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큰 소리 치지 않고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 절대 의존하는 자에게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니, 당연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됩니다.
4절,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사람의 슬픔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슬픔입니다. 즉 하느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일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죠. 하느님을 절대 의존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에 공감된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슬피 울며 기도하던 한나가 생각납니다. 아들이 없어 서러움을 토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의 사람이 없어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슬퍼했던 것이죠. 하느님은 그녀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귀한 아들 사무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봉헌합니다.
5절,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한’의 원어 ‘아나브’는 ‘가난한, 비천한, 겸손한’의 뜻입니다. 이 땅의 것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아니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땅을 허락하시는 것이죠.
6절,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여기서 옳은 일이란, 하느님의 뜻을 말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기쁨이고 만족이 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시던 대화가 생각합니다. 빵을 사가지고 온 제자들이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 하니까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누가 먹을 것을 주님께 드렸을까 궁금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 4:34,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우리는 주의 기도를 드리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삶’(마태 6:33)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그것이 성취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7절,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느님의 성품입니다. 이 하느님의 성품으로 타인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몇 주일 전, 하느님의 자비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그 자비를 흘러 보내지 않았다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 사함이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았습니다. 이 은총을 흘러 보내는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8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음은 인간의 감정, 사고, 의지가 일어나는 장소이고 행위와 태도가 결정되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지정의에 있어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9절,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의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평화는 전쟁 없음 뿐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전 세계와 자연계까지도 기다리는 것이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하느님의 지상 대리자 된 자,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세상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끊임없이 장벽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배제와 차별이라고 합니다. 성과 인종과 소수자들을 차별합니다. 에페 2장 14절 말씀대로,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허무신 분이 예수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평화를 일구어가는 삶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지속적인 방해와 핍박,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이를 견디며 사는 것이 하느님의 아들의 삶에 특징이 됩니다. 그래서 10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10절,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이 무슨 죄로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행하시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정의를 주장하거나 행하는 것만으로도 미움을 받습니다. 죄악으로 충만한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 자체가 고난의 삶입니다.
11절,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초대교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받았던 고난과 핍박을 계승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감에 어떤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지요?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언자들을 계승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영성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 예수 제자의 삶입니다.
팔복 중에 어느 한 말씀을 순종한다고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패키지로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팔복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자는 그 뜻을 반하는 세상 속에서 슬퍼하게 됩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며 울려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평화를 일구어 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모욕과 박해와 비난이 따라 옵니다. 이 삶이 천국으로 향하는 삶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성인의 날을 기념하며 팔복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성인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앞서 이 복을 누리다 주님 품에 안식하고 계시는 성인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하여 나 또한 팔복을 살아 행복한 제자의 삶을 걸어감으로, 공동체의 지체와 이웃들에게 본이 되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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