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 20:27-38 [부활에 대한 토론(마태오 22:23-33; 마르코 12:18-27)]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28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읍니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읍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30 둘째가 형수와 살고 31 다음에 세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읍니다. 32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읍니다. 33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었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읍니까?"
3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35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36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37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3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부활 신앙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요, 우리의 신앙은 한마디로 부활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다시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우리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도저히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전하고자는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차원의 “시신이 다시 살아나는, 즉 소생(蘇生)하는” 차원의 그런 부활이 아닐 수 있음을 깊이 고려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전하는 부활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지, “사실확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나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되다.”는 것이 의심 많은 도마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부활을 체험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지 “죽은 시신이 살아날 수 있다는 초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차이일까요?
흔히 우리는 “부활”이 사실이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고, 즉 부활이 환상이 아니고 실제 “사실”이기 때문에 제자들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때 주님의 “부활사실”은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이기보다는 제자들의 “믿음”을 통해서만 의미가 드러나는 신비였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단순히 객관적인 목격자일 수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거리를 하루만 활보하셨어도 무수히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데는 “믿음의 눈”, “말씀의 조명”,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도 “부활”을 잘못 이해하여 시신에 뿌리면 소생한다는 영생수를 찾아 헤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올바로 이해하는 이들은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순전한 신뢰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는 죽음과 고통이 어쩌지 못함을 체험합니다. 안죽고 오래오래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찰나를 의심없이 후회없이 사랑으로 사는 것이 영생이라고 아는 것이지요.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에 비하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사람들이 질문은 참으로 너절하고 비겁하고 어리석지 않습니까? * (2004. 11.7일자 강론초)
살아계신 하느님 안에 부활한 우리 (루가 20:27-38)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태어나 살아가는 일은 죽음의 가능성을 품은 채 서서히 늙어가는 일입니다.
어떤 이는 그다지 죽음에 대해 고민을 해본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담대한 사람일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가 삶에 대해서도 역시 고민을 해본 일이 없을 가능성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통하여 ‘한계’와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만일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삶이 대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죽음을 절대적인 끝으로 보고 그저 삶 자체에만 충실하겠다는 오늘 복음서의 사두가이파 같은 이들도 있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사고방식의 그들에게는 현세의 질서가 전부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예수님 당대의 특권 사제계급과 부유층들로서 자기들이 누리는 것들을 반성하거나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사두가이파가 부정하는 것은 부활의 가능성이 아니라 부활의 필요성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기 위해서 황당무계한 사례를 만듭니다. 신명기 25장에 언급된 죽은 형의 대를 이어주는 법을 들어 일곱 형제가 모두 죽었다가 부활한다면 하나인 형수는 누구의 아내라고 보아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이 때의 부활은 실은 ‘소생’의 의미입니다. 현세에 살던 그대로의 처지와 모습으로 다시 현세의 질서 안으로 그대로 부활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다 해도 실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참된 부활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달라지는 삶의 차원에 대한 표현입니다. 부활은 이제까지의 세상살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의 평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확인’한 이들, 곧 부활한 이들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 살고 죽는 일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참된 행복을 경험한 이들입니다. ‘자아’, 곧 자기가 생각하고 고집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관심은 접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절대적인 이유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깨달은 이들이 바로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 곧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신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느님으로 소개하시는 하느님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영원히 살아있는 이들입니다. 부활이 없다구요? 우리는 이미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이들이 아닙니까? 아니라면 대체 우리의 믿음은 뭐고 우리의 소망은 뭐란 말입니까?✠ (2007. 11. 11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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