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사랑하고 갈망하는 사람들만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요한의 두 번째 편지 1장 3절의 말씀으로 인사드립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광복 76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광복 직후에 일어난 분단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과제는 종전과 평화입니다.
한반도의 종전과 평화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15:5)고 말씀하신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 성시 시편 34장 14절,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는 말씀을 주시며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십니다. 한반도의 종전과 평화는 이 민족을 향하신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4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성 대 바실리오스는 이 시편의 구절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평화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그러니 주님의 평화를 찾고 추구하십시오. 다른 것이 아닌, 오직 ‘높은 곳으로 부르시는 상’(필립3:14)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달려가십시오. 참 평화는 하늘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것을 바라볼수록 우리를 불안하게 뒤흔드는 많은 것들에 매이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을 평화로이 하십시오. 그래서 필립비서 4장 7절에서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는 하느님의 평화’를 구하십시오.
평화를 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에페소서 2장 15절의 말씀처럼 평화를 가져와 유다인과 이방인을 결합시키셔서 새로운 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키셨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하늘과 땅에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골로사이 1장 20절 말씀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이 말씀의 뜻은 사람들과의 평화만이 아니라, 또한 하느님과의 평화도 의미합니다. 그것을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멀리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지상을 떠나 하늘로 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이루어 지려면 방해하는 모든 것들, 특히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평화는 아주 큰 덕이어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집니다(마태5:9). 당연하게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지상에 내려온 목적이 지상의 사람들과 하늘의 천사들을 평화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린다면,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는 이들은 사탄의 아들이라 불리게 됩니다. ‥‥
그래서 당신에게 형제와 다투려는 마음이 생길 때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와 다투는 것이라는 것을 잘 생각하고 당신의 분노를 멈추십시오.”
어떤 것도 평화의 덕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것도 평화와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4세기의 신학자 성 그레고리오스는 오직 “평화를 사랑하고 갈망하는 사람들만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평화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사회의 평화도 간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는 무엇보다 사회적 평화를 정의와 사랑과 함께 발전해 나아가야 하는 것으로 보고, 내면의 평화가 사회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조건임을 믿는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평화와 전쟁’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쟁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 국가가 외부의 적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어떤 나라의 시민들 간에 내부갈등이 있을 때 발생하는 내전의 경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람이 자기 자신과 싸울 때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전쟁이 가장 끔찍한 전쟁입니다. 자신과의 이 전쟁은 육체가 쾌락, 분노, 두려움을 무기로 삼아 영혼과 싸울 때 발생합니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우리의 욕망과 싸워 이기도록 노력합시다. 그럴 때만이 우리 형제들에게 평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 내면의 평화가 세상과 하느님과의 친교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로울 수 있는 원인이 되고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친교가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 앞에서도, 더 나아가 사탄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스(4세기)는 산상수훈 팔복에 나오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우리 주변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이루게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우선적으로 내적 평화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적 평화의 발견은 각 개인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 평화를 이루면,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모든 것들은, “평화의 왕”(이사9:6)이신 그리스도 없이 세상에 평화를 구축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실패할 것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평화를 구축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하는데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평화를 스스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에도, 또 자신들의 가정에도,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중대한 주제인 평화를 위해 그 어떤 일에서도 철학적 이론이나, 정치적 목적이나, 공허한 말들을 기반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평화는 인위적인 것이고, 그것은 이해관계가 추구되고 있을 때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필립4:7)는 어떤 이념이 아니고,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립 2:9)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이십니다.
이렇듯 신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평화란 백성들 간에 원만한 공존이 있거나 전쟁과 불화가 없는 상태를 뜻할 뿐만 아니라, 여러 세기에 걸쳐 예언자들이 선포한 메시아적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평화와 친교를 통해 내적 평화를 얻고 지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모든 인류와의 화해와 평화도 이룰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라는 하느님의 소리를 마음에 새기어, 먼저 하느님과의 평화를 가꾸어 가면서, 우리 한반도에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며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내적 평화를 이루며 이웃들과 평화 속에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놀라운 특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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