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몸의 등불(루가 11:34-36)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하느님이냐? 재물이냐?(루가 16:13)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루가 12:22-34)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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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게냐 재물에게냐 (마태 6:22-34)
온 세상을 있게 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만드신 우주 가운데 서도 변방의 은하계중 또 주변인 태양계 중 작은 별 지구 별 땅 속에 마련하신 금, 은, 보석, 지하자원 따위와 당신의 위엄과 영광을 겨루셔야 ^^ 한다니 참 말도 안되는 황송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현실 감각은 참으로 “참 사람” 다우셔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통절히 갈파하십니다.
우리는 구름타고 이슬 먹는 존재가 아니라 험한 세상에서 생존의 경쟁을 이겨야 하는 인생입니다. 우리의 “안전과 쾌락과 보람”을 재물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은 참 어려운 요구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조금 더 냉정해집시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은 하느님과 재물이 동등한 정도의 힘이 있다거나 또는 하느님을 믿으면 재물은 없어도 된다거나 하는 엉뚱하고 무책임한 말씀으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우리 삶에서 제일 중요한 궁극적인 가치로 생각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인생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성립한다는 통찰을 내용으로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삶과 죽음은 통째로 하나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와 관계, 그 둘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어떤 관계를 선택하고 맺고 끊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 존재는 바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자체, 또는 관계의 매듭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우리 존재를 하느님과 같은 차원으로 올려줍니다. "같은 차원"이라 함은 하느님과 맞먹는 교만이나 불손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길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우리 본분이 분명해지고 그 본분을 다하여 하느님과 사랑의 소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관계의 힘입니다. 하느님과의 그 “올바른 관계”를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우리를 구원하신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이미 세상에서 뼈저리게 경험하거니와 “재물과 맺는 관계”를 살펴봅시다. 재물과 맺는 관계는 우리를 재물과 같은 차원으로 낮추어버립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하느님의 형상인 사람, 인격, 영으로서의 사람을 대합니까? 그 사람의 소유, 명성, 직업, 저택과 자가용으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미 우리의 존재는 재물의 일부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 신자가 누굽니까? 영으로 다시 태어난 영적인 인간 아닙니까? 어디에 우리의 사랑과 충성을 바쳐야 “마땅하고 옳은” 일이겠습니까? (2008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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