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낭비
(2013년 3월 17일 사순 5주일 설교 말씀)
만찬 중에 예수님 곁으로 마리아가 다가와서 매우 값진 나르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유다는 ‘이 향유를 팔면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받을 것이고 이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텐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며 책망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의 행위를 두둔하며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리아가 저지른 막대한 낭비를 보고 분개한 유다와 제자들을 누가 감히 비난 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나 복지 행정을 맡은 공무원 같으면 절대 유다의 입장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마리아의 행위를 죄악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풍부한 사랑의 낭비 없이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여인 마리아, Dieric Bouts, 1440, Staatilche museen, Berlin
효율과 합리성의 울타리 안에 사로잡혀 있는 종교는 맥 빠진 종교이며 타산적인 사랑은 전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속에 얽혀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분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여인의 넘쳐흐르는 마음을 이해하셨을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그 마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는 이를 두고 ‘거룩한 낭비’라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낭비한 남녀들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이나 물질을 낭비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유다가 취한 태도와 똑 같이 합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종교적, 도덕적인 공리주의에 빠질 유혹을 늘 받습니다. 더구나 선택과 집중이라는 효율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경쟁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의 방향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의 울타리 속에서는 창조적인 ‘거룩한 낭비’가 고갈될 수밖에 없고 풍부한 영혼의 활동을 사멸시켜 버립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즉 고귀한 가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낭비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의 병이 양산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사랑의 심성, 즉 자기 포기의 낭비와 모든 이성을 능가하는 영의 활동을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정력을 오직 유용하고 합리적인 일에만 쓰려고 아껴 둔다면 창조적인 사랑의 행위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 초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중한 가치와 대상을 위해서 자신의 한계와 욕망과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자기초월의 표상이며 ‘거룩한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그 십자가 사건에 가장 값진 것을 바침으로서 참여했습니다. 그 녀의 절절하고 순수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행위로 표출되었습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떤 의무감도 없이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봉헌도 이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봉헌을 통해 어떤 결과물과 성과를 바란다면 진실 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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