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째 가는 계명
율법에는 세 가지의 용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정치적, 법률적인 용법으로서 죄를 억제 또는 방지하고 강제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육적인 용법으로 거울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거울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계명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훈적인 용법으로서 밤길을 밝히는 램프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있으므로 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계명은 이토록 긍정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행동을 수동적으로 만들 위험도 있습니다. 계명에 적힌 내용대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본인의 자발적인 마음에서 스스로 선택과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사제와 레위인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였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율법 조항에 비추어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만난 사람을 치료해 준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이 있기에, 그리고 그를 도와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발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율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서 본인 스스로 의로움을 자처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과연 스스로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외적으로 드러난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의인임을 자처한다는 것은 교만과 위선에 빠질 위험이 매우 큽니다. 그리고 율법을 모르거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경멸과 정죄로 이어집니다. 이웃을 감시하고 정죄하는 잣대로서 율법이 사용됩니다. 율법주의가 성행한 사회가 숨 막히는 감시와 정죄의 폐단에 빠진 경우가 꽤 많이 등장합니다.
‘자’는 기준이지만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재단하는 것은 획일주의의 폭력에 빠질 수 있습니다. 김원호라는 시인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자
언제부터인가 나는 마음속에 자를 하나 넣고 다녔습니다.
돌을 만나면 돌을 재고
나무를 만나면 나무를 재고, 사람을 만나면 사람을 재었습니다.
물위에 비치는 구름을 보며
하늘의 높이까지 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가 지닌 자가 제일 정확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잰 것이 넘거나 처지는 것을 보면, 마음에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확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가끔 나를 재는 사람을 볼 때마다 무관심한 체 하려고 애썼습니다.
간혹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틀림없이 눈금이 잘못된 자일 거라고 내 뱉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번도 내 자로 나를 잰 적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아직도 녹슨 자를 하나 갖고 있지만
아무것도 재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진실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계명을 가지고 자신과 남을 재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네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등불로서의 계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나머지 계명도 저절로 지키게 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0월 26일 연중 30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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