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는 예수님
어리석은 질문이고 상상이겠지만, 예수님은 그 크신 권능과 자비로 모든 병자들의 병을 쉽게 그것도 한꺼번에 낫게 할 수 있을 터인데 전혀 그런 조짐조차도 볼 수가 없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 모든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고통과 갈등을 없게 할 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 오히려 거절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사악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시어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면 편리할 것을 굳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실 까닭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게도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병자들을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도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를 간절히 만나기를 바라고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기대고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특히 병자들은 마귀 또는 악령이 들려서 병에 걸린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병의 고통에서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모든 삶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예수님 /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두 각자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백인대장이나 하인이나 회당장의 딸이 병에 앓았을 때 환자를 직접 만나서 고치신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고 병자를 대신해서 간절히 부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신앙이란 우리 각자가 직접 예수님과 대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과 정의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인 것입니다만, 그것도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치유와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 각자가 노력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변화되고자 하는 열망 없이 이루어지는 평화와 풍요는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이것은 얼마 못가서 금방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서로 다른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때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예수께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타인을 존중해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존중하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늘도 예수께서는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기도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뉴욕대학 부속병원 재활센터에는 이런 기도문이 있다고 합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자체를 주셨습니다.
구하는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2월 8일 연중 5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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