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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낮 꿈'의 노래

by 분당교회 2015. 12. 20.

‘낮 꿈’의 노래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문자로 기록하고, 꼭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별과 사랑 등 간절한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그것을 넘어 노래를 합니다. 그래도 그 마음이 다 드러나지 않을 때 노래하면서 춤도 춥니다. 그런데 같은 노래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는 한 개인의 간절함을 넘어서서 시대와 사회의 염원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백 년이 흘러도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전적인 명곡뿐만 아니라 통속적인 대중가요 속에서도 시대정신과 역사적인 상황이 담겨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불리어온 성가는 인류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루가 1:46-55)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고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의 축하를 받고 부른 노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저녁 기도에 전통적인 곡조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가 처음 했다기보다는 고생하며 궁핍한 상황 속에 있던 초대교회 교인들이 불렀던 노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어머니인 한나가 불렀던 노래와 매우 흡사한 마리아의 노래에는 하느님에 대한 순수하고도 절절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모든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그려져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고통 받고 멸시 당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라고 하는 독일의 철학자는 그의 명저 ‘희망의 원리’에서 인류가 끊임없이 꿈꾸어 왔던 유토피아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는 인류의 유토피아는 ‘낮 꿈’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인간이 밤에 꾸는 꿈을 분석하여 ‘리비도’라고 하는 것이 있음을 설명했습니다만, 블로흐는 인간의 ‘낮 꿈’이 희망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낮에도 먹을 것이 아른거리고 불평등 사회가 개선되는 꿈을 꾸는 것처럼, 입시와 경쟁 그리고 ‘수백만 아이들의 머릿속에 같은 것만 집어넣는 교실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이 서태지가 부른 ‘교실 이데아’에 열광하였듯이, 구속당한 사람들이 자유를 눈 뜨고 꿈꾸는 것처럼, 인간의 ‘낮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에 담긴 평등과 정의의 세상은 모든 인류가 꿈꾸어 왔던 ‘낮 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고대 사회에서 비천하게 굶주리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살았던 백성들의 입장에서 마리아의 노래는 절절한 희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렇게 희망하는 평등과 정의의 세상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자 유토피아의 속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갈망은 그것이 성취 되자마자 또 다른 갈망으로 대치되고, 장점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 역사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에 등장한 그 유토피아 이전에 마리아의 입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오게 했던 마리아의 마음 또는 영혼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사회정의와 평등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가 ‘사회개혁 집단’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개혁을 가능케 하고 지속적으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계로 변화시켜나가는 영성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노래 서두에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 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가슴 설레는 고백이 사회정의와 평등 세상보다 먼저였습니다. 입으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찬양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기쁨에 넘쳐 마음이 설렌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울렁이며, 설렌다고 고백할 수 있는 상황을 얼마나 맞이할 수 있을까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제법 있겠습니다만, 오래가는 경우가 드뭅니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내 가슴은 설레인다. 나 어렸을 때도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니... 나 늙어진 다음에도 제발 그러하여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죽어버리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옵나니 내 목숨의 하루하루여 천상의 자비로 맺어지거라.’라고 했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렸을 때 느꼈던 그 설렘의 감동이 죽는 날까지 지속되는 것을 ‘천상의 자비’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희망과 설렘이 우리를 유토피아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2월 20일 대림 4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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