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30일 연중 17주일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오 13:31-33,44-52
하느님 나라 비유 풀이
지난 주일에는 여름 휴가나 폭우 등의 이유로 워낙 많은 교우들이 빠지셔습니다. 지난 주일에 나눈 말씀 중에 중요한 내용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고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나라를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알게 하시고자 말씀하신 비유를 모아 놓은 비유 모음집입니다. 마태오복음을 읽는 회중은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영역과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복음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원래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복음’이라는 단어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카이사르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친구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어 적을 제거한 후, 다시 양진영이 절대 권력을 놓고 13년 동안 전쟁을 벌이던 중,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에 전해진 소식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
이렇게 당시에 ‘좋은 소식인 복음’이라는 단어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황제로 칭송받게 될 옥타비아누스가 세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음을 공표하는 일반적인 슬로건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승리가 완전한 승리로 끝나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고 2년 동안 로마시민들은 새로운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새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영국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는, 복음이란 ‘결정적으로 일어난 일 – 그로 인해 일어날 일 – 그리고 그 사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개념이 그대로 기독교의 복음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느님의 나라가 승리하였다는 것과 예수님이 다시 오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신앙의 신비 -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 는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Already – 아직 Not yet.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 기다림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이러한 이해로 마태오복음 13장을 읽으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의미를 알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복음에는 모두 5개의 이미지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합니다. 겨자씨, 누룩, 보물과 진주, 그리고 그물의 비유입니다. 각각의 비유에 담긴 하느님의 나라의 진리를 간단히 살펴보며 우리 삶에 적용해 보길 바랍니다.
- 겨자씨의 비유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나타냅니다.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처럼,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마침내 하느님 나라가 성장하고 완성될 것이라는 비전입니다.
그 어떤 씨보다 작은 겨자씨를 예로 드신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겨자씨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모인 아주 작은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 마침내 온 세상을 복음화하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비전입니다.
이런 비전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노래한 찬양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느님,
주의 심장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리 부르시는 하느님,
주의 손과 발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2. 그물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 역사의 종말입니다. 이 때 심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장을 보면, 바울로가 가이사리아 감옥에 갇혀 을 때 총독 펠릭스가 불러 기독교의 진리를 물어봅니다. 그 때 바울은 이렇게 기독교의 진리를 말합니다.
25, 바을로가 정의와 절제와 장차 다가올 심판에 관해서 설명하자 펠릭스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용어 중의 하나가 재림과 심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어느 진영 속해 있는가’ 입니다. 옥타비아누스 진영에 속한 자들에게는 복음이었고 안토니우스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란 어디에 속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할 것인가 하느님께 속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로마서를 통해 들어왔던 ‘육체를 따라 살 것인가 성령을 따라 살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엔 크리스토스”, In Christ입니다. 우리 성찬기도에도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셨습니까? 역사의 종말에 있을 심판을 통과하겠습니까?
3. 누룩의 비유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삶을 말합니다.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선한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으로 종말 신앙을 갖게 되면 지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종말에 주님 앞에 섰을 그 시점으로부터 지금 나의 삶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란 이런 시선을 갖는 것입니다. 종말로부터 현재를 보는 시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지금 나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선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통독하는데, 엊그제 필레몬서를 읽었습니다. 필레몬은 노예 오메시모의 주인입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 갇힌 바울로를 시중들던 사람입니다. 도망쳤다가 잡혀 감옥에 갇혀 바울로를 만나고 시중을 들게 되었는지, 아니면 필레몬이 보내서 시중을 들게 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필레몬이 바울로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가 오네시모를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들 한 형제로 맞이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초대교회의 시대는 노예제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안에서는 노예와 주인이라는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의를 이루어 가는 선한 삶이 살아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원리가 공평과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노예제사회를 뒤집어엎는 혁명을 도모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노예제 사회 체제를 초월하여 노예와 주인이 하느님의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는 대조적이고 대안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당시의 체제를 밑으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로마의 노예제사회는 무너졌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전으로 종말로부터 오는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평등의 가치로 진보를 거듭해 왔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차별과 소외는 존재합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차별과 소외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 정신으로 현재의 체제를 초월하는 대안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삶이 마침내 온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이 어두운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4. 보물과 진주의 비유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게 하는 동기와 이유를 말합니다. 보물을 발견한 농부나,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너무나 기뻐, 발견한 보물, 찾은 진주를 소유하고자 ‘있는 것을 다 팔았다.’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묵상 중에 비유에 나오는 농부나 상인이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무시하고 등지며 살아가는 우리를 가장 값진 존재로 여기시고 예수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존귀한 보물이고 좋은 진주입니다. 예수님짜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를 가장 존귀히 여기시며 자기 생명을 바치신 하느님이 왕이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서신 로마서 8장은 이 은총을 깨달은 사도 바울로의 고백입니다. 구절구절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고 찬양입니다. 특별히 31-32절 말씀이 와 닿습니다.
“31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찬송이 있습니다. 오늘 봉헌성가로 부를 483장입니다. “예수님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네.” 그런데 가사가 의역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은 이렇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리. 큰 재물을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의 것이 되겠네. 큰 집과 넓은 땅을 갖느니 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리. 못 박힌 손에 이끌림이 차라리 나으리.“
이러한 고백이 있을 때,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가 이해됩니다. 나를 보물로, 좋은 진주로 여기시고 자기를 내어주신 하느님, 그래서 하느님이 나의 전부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겨자씨의 비유, 하느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여러분의 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물의 비유,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과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심판을 뛰어넘는 구원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누룩의 비유, 하느님 나라의 영향력입니다. 종말의 시선으로 지금 나의 삶 가운데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시어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이기를 축복합니다.
보물와 진주의 비유,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가장 가치있고 존귀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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