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4일 연중 25주일, 희년실천주일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오 23:23-28
희년실천주일
성경에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인간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고의 제도가 있습니다.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법입니다. “8 너희는 또 일곱 해를 일곱 번 해서,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이렇게 안식년을 일곱 번 맞아 사십구 년이 지나서 9 일곱째 달이 되거든 그 달 십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죄 벗는 이 날 너희는 나팔을 불어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10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11 오십 년이 되는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낼 해이니, 씨를 심지도 말고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도 말며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절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도 마라. 12 이 해가 희년이니,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너희는 밭에서 난 소출을 먹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야 한다.”
희년법은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창조질서 회복의 법입니다. 주요 내용은 크게 3가지인데,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원칙에 따라, 첫째는 토지를 회복하는 것, 둘째는 주택을 회복하는 것, 세 번째는 노예를 해방하는 것입니다.
예수원 설립자이신 故대천덕 신부님은 희년의 법을 실천하는 것이 완전한 복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우리나라에 희년법에 기초한 성경적 경제정의가 이루어지도록, 예언자적인 외침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성경적토지정의모임이 만들어졌고, 토지공개념을 주장한 경제학자 헨리조지를 따르는 헨리조지협회와 함께 “희년함께”라는 선교단체로 발전했습니다.
‘희년함께’는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레위기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느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연구하고 가르치며 정책 제안을 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보에 보시면 ‘희년함께’에서 정리한 “희년실천지침”이 나와 있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룻기를 아실 겁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함으로 얻는 기쁨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룻기 이야기를 통해 희년에 담긴 하느님의 성품과 비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이 기근이 들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 뒤 두 아들은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살았지만, 자식을 보지 못한 채 두 아들도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 여자 세 명만 남았으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이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귀향을 결심합니다. 시모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불렀습니다. 두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입니다. 시모는 며느리들에게 ‘너희는 아직 젊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으라’고 강권했습니다. 이에 오르바는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둘째 룻은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나오미를 떠난 오르바가 나쁜 것이 아니죠? 다만 홀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떠날 수 없었던 룻이 큰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때 룻이 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룻기 1:6-17, “16 저에게 어머님을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성화하시지 마십시오." 하며 룻이 말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17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어머님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
“어머니”라는 단어에 “예수님”을 넣어서 읽어보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고백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이 됩니다. “예수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예수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예수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예수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예수님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저를 예수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추수하는 남의 밭에 가서 이삭줍기를 하는 것 말고는 호구지책이 없었습니다. 마침 룻이 이삭줍기를 하러 간 밭이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 이삭을 주으러 온 룻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그런데 시모 나오미가 룻에게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목욕재계를 하고 타작마당에 있는 보아스의 잠자리에 몰래 들어가 동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룻기 3장 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웬 여자냐?' 하고 물었다. '비녀는 룻입니다.'하고 룻이 대답했다. '어르신네께서는 이 몸을 맡아주실 분이십니다. 그 옷자락으로 저의 몸을 덮어주십시오.' 여기서 “어르신은 이 몸을 맡아주실 분이십니다”라는 표현은 보아스가 룻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개역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공동번역에서 ‘이 몸을 맡아주실 분’을 “기업 무를 자”라는 표현으로 번역 했습니다.
그럼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하는데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등의 뜻입니다. 고엘의 의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했고(레위 25:25-26) 근족이 노예가 되었을 경우 돈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레위 25:47-49절). (2) 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져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 친족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 한다(민수 5:8 35:12-21). (3) 근족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그 과부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주어야 한다(신명 25:5-10 마태 22:24). 즉,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아들로 간주되어 족보에 대신 이름이 올려 졌으며 또한 그 기업을 상속하였습니다.
‘고엘’의 제도는 레위기에 있는 희년법에 나오는 제도입니다. 레위기 25:23-25, “23 땅은 아주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 24 너희가 소유하는 땅 어디에서나 제 땅은 다시 되돌려 살 수 있어야 한다. 25네 동족 가운데서 누가 옹색하여 제 소유를 팔았을 경우에는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그가 판 것을 되돌려 살 수 있다.” 25절이 개역성경번역에는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레위기에 있는 이 말씀에 따라 룻은 보아스에게 ‘고엘’의 의무를 행하도록 호소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각 부족에게 땅을 공정하게 분배해 주고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되는 불평등의 문제를 희년과 ‘기업 무르기’ 등의 제도로 해소해 가면서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가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비전이 하느님의 말씀, 특별히 토라에 담겨져 있습니다. 토라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모세 오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토라에는 하느님의 비전인 평등공동체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구약을 관통하는 3가지 원칙은 ‘미슈팟’과 ‘쩨다카’와 ‘헤세드’입니다.
“미슈팟”은 재판관이 각자에게 돌아갈 몫이 공정하게 배분되도록 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정의를 말합니다. 백성이나 지도자나 잘못하면 벌을 받고 손해를 입히면 보상해야 합니다. 이중적인 잣대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너지면 사회가 존속되기 어렵습니다. 어느 범죄자의 말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개연성을 갖는 사회는 미슈팟이 무너진 사회임을 반증합니다.
“쩨다카”는 박애, 친절, 관용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내포하는 굳이 번역하자면 분배적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추수할 때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라든지, 안식년이 되면 땅의 소출을 거두지 말고, 동족들의 빛을 탕감해주라든지, 룻기에 나오는 ‘기업 무를 자’라든지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는 장치들입니다. 이것에는 철저히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슈팟, 쩨다카가 실현되려면 우리에게 “헤세드”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등지고 사는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다가도 그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사랑을 베푸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자”라고 번역합니다.
룻기를 보면,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기업무를 자”, 고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엘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헤세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고엘의 의무를 행했습니다. 보아스에게 헤세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룻 역시 헤세드가 있었기에 나오미를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이죠.
미슈팟, 쩨다카 등 하느님의 공의를 구현하기 위해 율법으로 정해놓아도 사람들 안에 헤세드가 없다면 그 모든 제도들이 무력해집니다. 하느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결국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헤세드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최고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이 헤세드를 받았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존재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그 마음에 헤세드를 품게 됩니다. 그 사랑으로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2독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르나바를 모본으로 해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유무상통은 바로 헤세드에 근거한 쩨다카의 실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부와 고아나 나그네로 상징되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마태 25장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대로 가난하고 소외당한 그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며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그들의 가난과 삶의 고통이 단순히 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닌 미슈팟, 쩨다카의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의 고통 뒤에 있는 사회적인 모순, 사회의 불의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한 번 만났던 아프리카 선교사님의 간증이 기억납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영혼을 사랑하여 그 땅에 가서 그들의 영적인 아비가 되어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섬기고 돌봐주어도 기근과 분쟁의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고통을 아파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의 고통 뒤에는 그들을 착취하는 1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노예해방가 윌버 퍼스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예로 살아가는 흑인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노예로 살게 하는 불의한 제도, 영국 국가 재정의 1/3의 재정을 벌어들이는 노예제 폐지 운동을 전개하고 성사시켰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미슈팟과 쩨다카를 성취해 간 간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은 반드시 하느님의 공의와 공평을 가로막는 사회구조적인 죄악을 해결하기 위한 투신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헤세드를 가진 사람은 마침내 하느님의 성품인 미슈팟과 쩨다카까지 품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레위기의 말씀을 개인적인 거룩의 삶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룩을 명령하는 레위기 안에 사회적인 공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희년과 기업무르기 등 미슈팟, 쩨다카를 세우는 구체적인 제도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실천해야만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메세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호되게 호통을 치신 것이죠. 마태 23:2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 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들이 바로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과도 같은 개인적인 성결에는 철저하지만 ‘미슈팟’, ‘쩨다카’를 실천하지 않는 잘못된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천덕 신부님도 희년이 빠진 영적인 구원만을 전하는 것은 반쪽 복음이라고 성경적 토지 정의 - ‘미슈팟’, ‘쩨다카’를 실천하는 ‘헤세드’가 완전한 복음이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보아스가 지녔던 ‘헤세드’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진정 이 땅에 ‘미슈팟’, ‘쩨다카’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살아가는 온전한 복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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