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관계”로서의 사랑 (루가 10:25-37)
7월 15일(연중 15주일)
임종호(프란시스) 신부
임종호(프란시스) 신부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율 법학자의 이 질문은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율법을 어떻게 읽었느냐”고 반문하시자 곧장 훌륭한 답을 내어놓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너무 싱거운 예수님의 응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전혀 별개의 다른 “영적 지혜”를 들려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율법의 정신을 진심으로 실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이 때 아마도 율법학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듯합니다. 자신의 지적인 능력이 성서의 율법을 뚜르르 꿰고 있음을 예수님도 인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한걸음 나아가 현실 속에서 율법을 적용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임을, 그 적용을 위해 자기들 율법학자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논의하고 있는가를 드러낼 차례입니다. 그래서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율 법학자는 전통적인 이해에 따라 자신의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이 밖에서 상급으로 주어지는 줄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상급을 위한 자신의 실천을 위해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의 이중계명(二重誡命)을 알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가 했어야 할 올바른 질문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가 아니라 “왜 저는 사랑의 계명을 알면서도 참으로 사랑할 힘과 지혜가 부족합니까?” 입니다.
우 리의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을 하느님 아버지로 모시고 자녀로서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자 하느님의 마음에 들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긴 결과입니다. 우리 구원의 비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사는 일이 답입니다. 이 때의 “올바른 관계”란 하느님과 이웃을 나의 구원에 필요한 “대상(실체)”으로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이 바로 올바른 관계이고 구원의 내용이 됩니다. 이웃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맺어갈 관계의 이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긍정된 우리의 존재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 아름답게 꽃을 피웁니다. 사랑은 강제되는 계명이 아닙니다. 사랑은 “올바른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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