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1일 연중 16주일
김장환 엘리야 사제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라!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모셔 들였습니다. 요한 11장을 보면, 이곳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마르타와 그 동생 마리아, 그리고 나자로가 사는 ‘베다니아’라는 마을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셔 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잠자리까지 제공해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동 지역의 손대접 문화는 아주 친절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이 머무르시는 동안 그 동안 못드린 맛난 것도 맘껏 드시면서 편히 쉬게 해드리고 싶었을 겁니다.
이런 수고를 감수하고라도 마르타가 주도적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모셔 들였다는 것에서 예수님을 향한 마르타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섬김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성품입니다. 섬김은 제자도입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서 예수님만 응시하고 앉아 있습니다. 언니 마르타가 손님 대접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압니다. 언니의 눈총도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하느님 나라의 이야기가 너무 좋아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흐뭇하게 그동안 있었던 전도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누군가의 발치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들이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도 남성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성인 마리아가 제자처럼 행동했고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를 당신의 제자로 생각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습니다. 루가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등장시킴으로 여성도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문화적 한계로 12제자가 다 남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복음서를 보면 마르타 마리아처럼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에는 차별도 한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중드는 일을 하던 마르타가 예수께 와서 불평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손님 대접으로 많은 일에 바쁘고 힘든데, 그저 주님 발치에 앉아 있는 동생 마리아를 보니 화가 난 겁니다.
마르타가 한 말을 마르타의 입장이 되어 읽어 보십시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마리아에 대한 불만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서운함까지 느껴집니다.
여러분이 마르타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사실 교회 안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르타처럼 손과 발을 움직여 땀 흘리는 수고가 없다면 교회는 절대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만 해도 성당청소, 애찬봉사,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성물관리, 복사, 안내영접, 독서봉사, 교회위원, 또래모임 섬김이, 단체임원, 등등. 그러고 보니 아직 교회 밖으로 나가 섬기는 봉사가 없네요. 과제입니다.
이 모든 섬김들이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다보면, 마르타처럼 종종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주님께 대한 섭섭함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마르타도 그랬는데요 뭐.
그런 마르타에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를 개역개정성경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감당할 만한 분량만큼만 처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너무 욕심을 내지 말고 필요한 것만 하라는 거지요. 때로 사랑의 마음이 너무 커서 일이 커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 한 가지’ ~ ‘참 좋은 몫을 택하는 것’이란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예수님이 기뻐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자매 모두가 모두 일한다고 예수님을 곁을 떠나면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으신거죠.
예수님은 마르타 마리아 둘 다 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환대의 수고, 말씀 경청,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고가 아닙니다.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 난 예수님 대접하는 일로 바빠서 말씀 들을 여유가 없으니 너가 잘 들었다가 나중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나한테 말해줘. 잘 듣고 나중에 설거지나 도와줘”
그런데 진짜 몸으로 섬기는 일이 더 힘듭니다. 요즘 규모가 있는 교회들을 보면 말씀 배우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프로그램이 많고 거기에는 사람들이 북적됩니다. 그런데 성당 청소하고 애찬하고 몸으로 봉사하는 일은 안합니다. 돈 주고 사람을 사서 합니다.
기독교는 몸으로 살아내는 삶의 신앙입니다. 먼저 인사하고, 미소짓고, 기꺼이 몸으로 하는 수고를 감당하고,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솔선수범! 그렇게 수고하고도 ‘그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루가 17:10, “너희는 명령대로 모든 일을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하고 말하여라.“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섬김의 제자도는 저절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물론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 좀 하면 생색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자기 의가 가득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업신여기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섬김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존재의 변화입니다. 말씀 앞에 머무르며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바로 알고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마리아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미국사회에 영향력을 갖는 10대 교회 중에 세이비어 처취라고 있습니다. 150여명 교인들이 180억원이 넘는 재정을 사용하면서 많은 사역들을 합니다.
서번트리더십학교가 있는 페스티발 센터, 최초의 지역사회 사역의 시작지인 토기장이의 집, 치유사역인 콜롬비아 로드 진료소, 노숙자병원(그리스도의 집), 희년직업소개센터, 세이비어교회 방문자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인 안드레의 집, 남성 AIDS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센터인 요셉의 집, 노인들을 위한 주거사역지인 사라의 집, 방과 후 예능교실인 페트리샤 사이타 예능교실, 저소득 주민들의 주택소유, 유지, 보존을 위한 사역인 만나 지역개발 사역, 샤(Shaw) 흑인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방과 후 예능교실인 행동하는 예술, 새 공동체교회(New Community Church), 침묵기도를 위한 수양관 두 곳 등 엄청나지요?
이 모든 것을 신자들이 운영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먼저 약 3년이 소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학교와 서번트 리더십 학교의 훈련과정을 받습니다. 이 과정을 이수해야 교인 자격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연장 교육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매년 서약을 해야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됩니다.
서약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 온전한 십일조 헌금, 소그룹 사역 공동체 모임에 한 주간에 한 번씩 참여, 교회와 연관된 45가지의 지역사회 사역에 은사별로 자원봉사자로 참여, 자신의 삶의 전 지경을 포함하는 영적 자서전을 써서 공동체에 발표, 매년 각 신앙 공동체 주관 관상 기도 영성 수련회 참석, 교인의 자격을 매년 갱신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개방해 동료 교인들과 함께 좀 더 깊은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이 중에 오늘 복음과 연관되는 내용으로 주목하는 것은 3년 과정의 제자훈련, 하루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 그리고 매년 피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비되고 병행되어야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세우는 자비의 사역에 참여하는 제자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성과 실천의 균형!
지난 주일 설교에 소개했던 도르시 데이가 설립한 환대의 집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로시 데이와 더불어 가톨릭일꾼운동을 창립한 피터 모린은 경신, 경문, 경작을 강조했습니다. 하느님을 예배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국 가톨릭에서는 이렇게 적용하여 일합니다.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성심으로 공부하며, 기쁘게 일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슬로건은 베네딕트수도원의 “기도하고 노동하라”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기도와 노동(일)에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공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누구신지 명료한 의식이 있어야 헛된 기도와 허튼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오래 기도하고, 멍청한데 부지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제일 나쁜 지도자 부멍! 바랄 것을 바라고, 믿을 것을 믿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카톨릭 일꾼 사이트 인용)
제대로 공부가 안 되면, 오늘 1독서 아모스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아모스 8:11,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내릴 날이 멀지 않았다.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그래서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 설교자들이 출현합니다. 아모스 시대에 있던 거짓예언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성서와 시대를 공부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들일지라도 거짓예언자들에게 미혹되어 엉뚱하게 열심을 내며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성공회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주보 2면에 실린 글은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성명서입니다. 꼭 읽어보시고 바른 기도와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시대를 향한 주님의 뜻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라고 저 같은 사제를 교회에 두셨습니다. 오늘 2독서 골로사이 1장 28절의 말씀이 저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성숙한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 서도록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경고하며 가르칩니다.”
성서공부와 제자훈련, 독서모임 등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제자의 삶에 우선순위를 두십시오. 묵상과 기도, 그리고 사랑의 실천에 균형을 갖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이렇게 사는 것이 보람과 기쁨이 충만한 존귀하고 위대한 인생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세상은 하느님의 은총을 더불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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