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7일 연중 33주일
설교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성공회 분당교회 관할사제)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과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헤로데가 지은 성전입니다. 헤로데 성전은 3번째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 성전으로, 기원전 967년경에 짓기 시작하여 7년 정도 걸려 완성되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이 화해하는 자리입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 선교적인 존재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할 때, 그 죄로 죽어야 하는 자신을 대신하여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다시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은총의 자리가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희생 제사가 타락했습니다.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바알로 대표되는 우상을 섬기면서도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우상 숭배로, 성전은 더럽혀 졌습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가 없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만 드려지니,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행해야 하는 공평과 정의는 무너지고 착취와 독점, 불평등과 불의만이 난무하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에 예언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외쳤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9:23-24,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헤세드”)과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쩨다카”)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개역성경>
피 맺힌 예언자들의 외침에는 귀를 막고, 자신들의 욕망만을 따르다가 이스라엘은 마침내 심판을 받아 멸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벨론의 느브겟네살 왕에 멸망당하고 바벨론의 포로기가 시작됩니다. 이 때 솔로몬 성전이 무너집니다. 제 1성전 시대가 끝난 것입니다.
제 2성전은 베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칙령을 반포함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이 총독 쯔루바벨의 지휘 하에 건축하여 515년에 봉헌됩니다. 기원전 169년에는 유다를 점령한 시리아 임금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이교도신을 끌어들임으로써 성전이 더렵혀집니다. 이에 기원전 165-164년경에 마카베오가 안티오코스를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여 다시 봉헌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2성전도 기원전 63년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파손되고 제 2성전 시대가 끝납니다.
이후 헤로데가 기원전 37년경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로마의 추인을 받은 후 성전을 확장하여 재건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이전의 것들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자신을 경건한 유다인으로 자처하고, 로마인들에게 자기의 왕권의 품위를 과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성전이 바로 이 헤로대 성전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이 타락했다는 것이죠.
제사장들과 그와 결탁한 권력자들은 ‘제사를 통해서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성전에서 기도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비싼 제물을 바치게 하고 헌금을 드리게 하여 자신들의 배만 불려갔던 것입니다. 이런 타락한 헤로데 성전도 기원후 70년 유다인들의 봉기 때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과부의 헌금이야기를 배치한 루가의 의도가 이것입니다. 과부처럼 가나한 사람들이 바친 헌금으로 성전을 화려하게 꾸미고 금고에는 돈을 쌓아가는 성전의 타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거룩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그 당시 신앙의 타락상을 알 수 있습니다. 루가 11:39,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하다.”
이렇게 타락한 성전에 대항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성전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는 성전 이데올로기에 맞서, 요단강 물세례를 통해서도 하느님이 죄를 용서 해주신다고 선포하고 세례 운동을 벌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전에만 계시지 않고 요단강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신다. 진정한 예배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닌, 회개와 순종을 통해 하느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요한의 신앙 노선을 지지하셨고 제자들에게 물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시며 세례 요한의 운동을 계승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신 것입니다.
속으로는 곪아 터진 것이 성전인데, 사람들은 외관의 화려함만 보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이 나오는 마르코복음 13장에서는 이렇게 외관에 감탄한 무리가 제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화려하게 보이는 성전 이면에 가득한 착취와 불의를 보고 보시는데, 제자들은 그저 보이는 화려함에만 취해 있는 것입니다. 스승의 길을 따르는 자가 제자인데, 스승의 마음에 전혀 공감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7일 저녁,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한국교회 연합으로 거리예배가 있었습니다. 강남역 거리 한가운데 있는 CCTV 철탑 위 1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농성하고 있는 김용희님의 억울함이 해결되기를 기원하는 예배였습니다. 김용희님은 노조를 만들려고 했다는 이유로 삼성에서 해고당한 분입니다. 그분은 벌써 오늘로 161일째 농성하고 있습니다.
그 철탑 앞에는 높다란 삼성 빌딩이 있습니다. 삼성이 세계에서 6번째 회사라고 합니다. 21세기 세계경제전쟁의 각축장에서 삼성같은 글로벌한 기업이 있어야 국가경쟁력이 있다고 합니다. 삼성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초일류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삼성에 취직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찬사와 영광 뒤에는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조합조차 허용하지 않는 무노조경영원칙으로 무수한 노동자들을 회유하고 탄압해 온 흑역사가 있습니다. 반도체공장 라인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리고 죽어가도,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0년이 넘는 법정 투쟁으로 산재 인정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모와 냉대와 억압과 권모술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서있는 빌딩처럼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과 그 그늘 아래서 병들고 죽어간 사람들, 억울함을 해결해 달라고 철탑 위로 올라가 있는 사람, 이 둘 중에 하느님은 무엇을 보실까요? 과부와 고아의 하느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신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계실까요?
지난 13일은 기독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한지 49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동과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용균법이 제정되었지만 엊그제에도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던 노동자가 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추워지는 계절에, 사치와 향락이 넘쳐나는 강남역 거리에서 하늘을 향해 외치는 절규가 이 시대의 기도이고 예배입니다. “하늘 뜻이 철탑에 이루어지이다.”
지난 주 중 오늘 본문을 렉시오 디비나 방법으로 묵상하며 눈에 들어온 구절은 19절입니다.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제자들이 참고 견뎌야 하는 상황이 왜 일어나는 걸까요?
하느님 나라 백성을 살아가니까 세상의 가치관과 질서가 하느님 나라의 원리와 부딪치고 갈등하게 되고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은 로마 황제만이 주님으로 숭배 받는 시대에 나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팍스 로마나 제국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절대 가치가 군사력이고 경제력인데, 비폭력의 평화를 살아가고 나눔과 섬김의 가치관으로 서로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로마 제국의 질서와 가치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와 충돌하는 것이고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눈에 보이는 박해는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피라미드 질서와 맘몬니즘의 가치는 예수님의 복음, 하느님 나라 원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갈등과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면, 그 신앙의 진위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오늘 “참고 견뎌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세상과 맞서 살아가고 있다는 삶의 증거입니다.
그들이 복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불이익을 당하고, 고난을 받아도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가 노래하는 비전, “새 하늘 새 땅”, 주님의 재림으로 임하게 되는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였습니다. 이를 종말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을 지닌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때문에 겪는 그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도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소망으로 사는 사람들은 오늘 2독서에서 권면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2데살 3:13, “교우 여러분,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선”이란 “하느님의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빛이 되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대망하며 주님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제자의 길입니다.
믿음은 주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마음이 부어져,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주님의 손과 발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기억난 찬양이 있어 제가 불러 볼까 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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