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9월27일 연중 26주일
설교말씀
이경호 베드로 주교
에제18:1-4,25,32 / 시편25:1-9 / 필립2:1-13 /마태 21:23-32
참된 신앙의 권위로 살아가는 사람들
코로나 19가 장기화되면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직장을 잃은 분들도 많고,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규모가 큰 기업도 버티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교회도 많습니다. 지난 상반기에는 교구에서 코로나 19 지원금을 모금해서 어려움을 겪는 교회를 지원해 주었는데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은총으로 이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길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9월 29일은 대한성공회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3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 대한성공회 모든 교회들이 관구 설립기념 주일로 지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고요한 주교님은 이 땅을 향해 오실 때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마치 나룻배 한 척으로 전쟁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 만큼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이겠지요.
당시 조선 땅은 그리 매력 있는 선교지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더 선호했습니다. 조선을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역자를 구하는 것도, 선교기금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 130년 동안 이 교회를 섬겨 오신 모든 선교사, 역대 주교님들과 사제들, 그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기도하고 봉사로 아름다운 신앙을 이어오신 모든 분들의 헌신과 수고를 기억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이 예배를 봉헌합니다.
우리는 홀로 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을 때 서로 달라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기대가 다르고 내 마음 같지 않아서 불편하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서로의 마음이 닫혀 있을 때 답답하고 힘듭니다.
특히 기대하고 믿었던 사람 사이에 불편한 일이 생기면 마음의 상처는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주님도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대나 환영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 주위에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음모를 꾸미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잘 알고 믿는다고 자부하던 백성의 원로들, 대사제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대사제들이나 백성의 원로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정치적 기득권과 경제적 이득을 누리며 살았던 부유한 귀족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에 힘입어 권한 행사하던 사람들입니다.
율법학자들, 바리사아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권위를 등에 업고 종교적인 힘과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의 권위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성전에 계신다.
하느님께서 이 성전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이 성전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이 성전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율법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율법대로 사는 것이 하느님을 바로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율법은 틀림이 없고 잘못이 없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의 권위로 살던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제대로 한방 먹이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용서 받으려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예수님이 행위가 매우 불편합니다.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주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이 말은 “당신은 이 거룩한 성전에서 가르칠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권한으로 여기서 가르치고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권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실제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아들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냐? 묻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맏아들." 이라고 대답합니다.“ 예 맞습니다.”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단 예언자가 다윗에게 양의 비유는 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생각, 판단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뒤흔드는 말씀입니다.
세리와 창녀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율법에 의해 죄인을 낙인찍힌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대사제와 원로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아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세리와 창녀는 너희들이 죄인이라 규정했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가서 일한 아들과 같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성전의 희생제사와 율법의 권위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권한을 행사했던 사람들에게 너희야말로 하느님의 마음과 뜻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알고 있느냐? 반문하시는 겁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잘 알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잘못된 권위로 잘못된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권위, 성서의 권위, 교회공동체와 성사의 권위, 성직자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이런 신앙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권위의 근원, 출발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입니다.
신앙의 권위는 어떤 물리적 힘이나 지위, 고정관념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참된 권위는 하느님의 마음과 뜻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공회는 성서와 전통 그리고 이성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성공회는 혼자 성서를 읽고, 홀로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 깊은 소통 사귐의 관계를 맺으며 사랑의 나눔, 상호존중과 소통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 마음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습니다. 혼자만의 신앙은 부족하고 때로 위험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운 질서, 새로운 권위, 그리고 새로운 꿈과 비전에 응답하고 그 대열에 합류하라는 요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은 늘 하느님의 마음과 뜻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고 있는지..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고 있는지..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렇게 권면합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한마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참된 예배는 이런 사랑의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참된 봉사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참된 헌신과 나눔도 서로 감사하는 마음이어야 보람과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이런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몇 명인가? 는 매우 중요합니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적어도 5명이 이상이라면 그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떠나갑니다. 분당교회가 서로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주는 주님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견진을 받는 분들을 축복합니다.
견진은 성령의 기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내면을 더욱 강건한 삶이 되도록 축복할 것입니다.
견진은 교회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는 일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한 헌신하는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노력하고 다짐하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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