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회력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고 성주간을 시작하는 성지,고난주일입니다. 갈릴리 가파르나움을 근거지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시던 예수님은 하느님의 때가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환성을 올렸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군중들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윗 왕처럼 통일된 이스라엘을 세울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이들의 처지를 헤아려보면 이해가 됩니다.
예루살렘은 강도의 소굴로 타락한 성전이 보여주듯이 더 이상 하느님의 도성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야합하여 권력과 부를 누리는 성전 계급들과 갈릴리 비옥한 토지를 소유한 부재지주들만이 호화롭게 살아가는 제국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상하수도도 잘 정비되어 있고 규모 있는 가옥들이 있는 예루살렘의 상부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상하수도 미비하여 물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상부도시의 하수와 쓰레기를 처리하는 하부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부도시를 지나 성전을 향해 가셨고 예수님께 환성을 올리던 이들은 예수님이 늘 환대하시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시는 그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입니다. 그는 해변도시 카이사리아에 살고 있다가 과월절이 되면 치안을 위해서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예루살렘성에 들어오는 그의 위용이 대단했습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준마를 타고 동쪽에서 비쳐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들어왔습니다. 칼과 창으로 평화를 이룬 로마 제국의 팍스 로마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태양을 받으며 위용 있게 입성하는 빌라도와는 다르게, 태양을 등에 지고 있어 예수님의 얼굴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고 초라한 나귀에 올라 앉으셨으니 군중들에게 가리어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즈가리야의 예언에 따라,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즈가 9:9-10, “9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10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은 군사력에 의한 로마의 평화와는 다른 평화, 하느님이 주시는 샬롬을 바라는 평화의 왕을 나타냅니다.
“막대한 세금을 수탈하며 칼과 창으로 억압하는 로마 황제가 왕이 아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시고 하느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세우신 야훼가 왕이시다!”
사랑으로 환대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들어오신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시고는 12제자와 함께 베다니아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성월요일에 다시 성전으로 오셨습니다. 이 때 성전정화 사건이, 아니 성전 폐기 선언이 일어납니다. 로마권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성전 계급을 질타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성화요일에는 다시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셔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과 논쟁을 벌이시고 가르치셨습니다. 핵심은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라’입니다.
대표적인 세금 논쟁에서 예수님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말씀하셨습니다. 카이사르 황제도 하느님께 속한 한낱 인간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황제에게 속한 존재인가 하느님께 속한 존재인가를 도전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성수요일에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 때 어떤 여자가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제자들이 아까워하며 분개할 때 예수님은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다”고 여자를 두둔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이유를 남성인 제자들조차 알지 못했는데, 이 여인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인 나병환자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을 정도로 무시 받던 여인이 주님께 위로를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시 받고 소외당한 인생들이 존귀함을 회복하는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환대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복음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오늘 그 작은 실천으로 노숙인 무료급식 섬김을 합니다. 성공회분당교회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환대하는 복음 공동체로 우뚝 서기 바랍니다.
성목요일, 성금요일, 부활밤으로 시작해 부활절로 이어지는 성토요일이 계속됩니다. 성삼일(聖三日, Triduum Sacrum)이라고 합니다. 성삼일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펼치신 구원 사건의 원형이고 총체입니다.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역사가 성삼일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펼쳐집니다.
교회는 이 정점을 파스카 신비(Paschal Mystery)라고 불렀습니다. ‘파스카’는 구약 시대 이집트를 탈출하기 직전, 심판의 칼을 든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간’ 과월절 사건에서 나온 말입니다. 구약의 사건과 겹치는 이 신약의 사건은 파스카의 은총이 이제 모든 인간에게 펼쳐졌음을 의미합니다.
이 파스카는 성목요일의 세족과 마지막 만찬, 성금요일의 십자가 처형사건, 그리고 성토요일 무덤의 침묵을 거쳐 하나로 이어지는 부활의 구원 사건입니다. 성삼일의 파스카 신비와 전례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모두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의 모델을 제공합니다.
전례는 그 구원 사건을 되새기며, 우리 몸에 새겨서 살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장치입니다. 성목요일 오후 8시, 성금요일 오후 2시, 성토요일 오후 7시 반에 성당에서 거행하는 전례에 참여하시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몸으로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리얼하게 다룬, 멜 깁슨이 만든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고난을 겪으셔야만 했던 본질적인 이유는 그 영화에 보이지 않습니다.
‘고난’으로 번역되는 Passion의 다른 뜻은 ‘열정’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신 이유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샬롬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신 예수님은 그 나라를 살아가셨습니다. 그 열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성목요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성금요일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에 의해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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