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로 6·25전쟁이 있은 지 일흔 한해가 지났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와 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모범 국가가 되었습니다. 71년 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피 흘려 싸웠던 호국영령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던 호국영령과 유가족 분들께 감사와 위로를 전합니다. 아울러 속히 남과북, 북과미의 대화가 재개되어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되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어 남과 북이 공존 번영하는 평화의 새 시대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지난주일 우리는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가시다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호수를 건너오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사는 군대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셨고 그를 마귀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아마 그곳에서 하루를 묵으셨던 것 같고 다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돌아오셨습니다. 그러자 또 다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호숫가에 서 계시는데, 의외의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 애원합니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마을의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당시 회당은 학교 재판소 종교기관의 역할을 하던 마을 중심이었고 세 명의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최고 지도자인 것이죠. 그런 그가 나자렛이라는 시골 벽지에서 온 예수에게 엎드렸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입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를 따라 나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중 속에는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그 긴 세월동안 의사를 찾아 다녀보았지만, 병은 더 심해진 상태였습니다.
하혈증은 월경이 지났는데도 피가 멈추지 않는 질병입니다.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오염의 근원으로 간주되어 종교적으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사회적으로는 철저하게 격리되었습니다.
결국 여자도 남편과 자식에게 버림받았을 것이고 공동체에서는 완전히 소외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참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여인의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자기와 같이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 나서 치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마르코 3:10,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고쳐주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예수를 만지려고 밀려들었던 것이다.”
여자가 이 소식을 들은 것이비다. 복음입니다. 이 소식에 용기를 얻은 여자는 군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사람들을 밀치며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율법으로는 허락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손을 대자마자 출혈이 멈췄습니다. 할렐루야!
이 여자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복됩니다. 로마서 10:15 “전도자로서 파견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17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자신에게서 능력이 흘러나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군중을 돌아보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반문합니다. 군중이 밀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닿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죠.
여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실직고 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말씀드렸을 겁니다.
군중들 속으로 뛰어들 때만 해도 율법을 어기는 부정한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즉시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능력이 흘러 나와 피가 멈추었기에 정결한 여자입니다.
그 어떠한 죄를 지어도 주님 앞에 나가면 주님의 보혈이 그 모든 죄를 씻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온 인류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고 하느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예수님이 인정하신 여자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모든 장애물, 율법과 군중들을 헤치고 예수님께 나온 것이 믿음입니다. 마르코는 이 여자를 믿음의 본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는 샘물도 그 샘물을 마실 때 해갈이 됩니다. 목이 마른데 마시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샘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시지만 우리가 그 분께 나가지 않으면 그분은 아니 계신 것입니다.
여자와 같은 믿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때 구원을 받고 하느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히브 11: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안심하고 가거라”는 주님의 말씀은 “샬롬을 누리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샬롬은 전인적으로 건강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육체적인 치유인 동시에 공동체 내로 복귀시키는 사회적인 치유입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단절되었던 사회적 관계가 회복되어 일상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자가 완전한 구원을 얻는 벅찬 기쁨의 자리에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야이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딸에게 손을 얹어 주셔야 하는데, 여자로 인해 지체되고 있으니 아비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요?
그런데 우려했던 비보가 들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축복하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여자도 원망스럽고 여인을 축복하고 있는 예수님도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비보를 전해준 사람들은 회당장에게 더 이상 예수님께 폐 끼지 말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을 들은 체도 안하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 야이로는 “이제 딸이 죽었으니 저는 가서 장례를 치러야 겠습니다. 그냥 돌아가셔도 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갔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순간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지킬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당장 집에 가보니 소녀의 죽음에 사람들이 울고 불며 소란한 가운데 있습니다. 장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울며 떠들지 말라고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내시고 자라게 하시고 죽게도 하시고 부활하게도 하시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때,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닌 긴 과정 중의 한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에 애곡하던 사람들이 코웃음만 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복음에 코웃음을 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하니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탈리다 쿰”은 “소녀야 일어나거라”는 말입니다.
“일어난다”는 말은 마르코복음에서 부활을 나타내는데 주로 사용한 단어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별세성찬례 성찬기도 특송 – 몸소 죽음을 겪으시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복된 부활의 희망이 있으니, 죽음의 운명이 분명하여 슬퍼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의 약속은 큰 위로가 되나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다만 새 생명을 변화될 뿐이며, 이 세상의 나그네 집을 떠난 후에는 하늘의 영원한 거처로 이동하게 하시나이다.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난 구원 사건은 전적으로 아버지 야이로의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 간청했고, 딸의 임종 소식을 들은 절망의 순간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야이로의 믿음이 딸을 살리는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마르코복음 2장에서 친구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고 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갈 수 없자 지붕을 뜷고 예수님 앞으로 중풍병자를 내려 보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대리적인 믿음도 중요합니다. 이것이 중보기도로 표현됩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중보기도입니다. 대표적인 중보기도는 감사성찬례 중에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이죠. Prayers of Intercession이라고 합니다.
타인을 대신하거나 사회나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하느님께 Intercede, 나아가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무릎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중보기도를 드리는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가 사랑의 시간입니다. 시간을 내어 참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거스틴이 쓰러진진 3년이 되었네요. 중보기도 드리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 “어거스틴, 일어나거라” “윤시아, 일어나거라.” 말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주간 오늘 복음과 서신을 묵상하면서 ‘손’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담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소녀의 손을 잡아 주심으로 살아났습니다. 엊그제 금요일 복음에서 예수님 앞에 나온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십니다.
이렇듯 손은 연결, 연대, 환대를 상징합니다. 주님과 연결되고 주님께 환대받은 사람들, 주님을 환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 임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제 자기들의 손을 펼침으로 구원의 은총이 흘러 나갑니다. 고후 8:7,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났습니다. 믿음이나, 언변이나, 지식이나, 열성이나, 우리에 대한 사랑에서 여러분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은혜로운 모금 사업에 있어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은혜로운 모금 사업, 구제와 선교를 위해서 손을 피고 주님의 손이 되어 사랑을 나누는 삶이 구원을 누리는 삶이며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작은 손을 펴서 노숙인들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언제나, 한 손으로는 주님을 잡고 한 손으로는 가난한 이웃의 손을 잡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는 누구인가? (1) | 2021.07.11 |
---|---|
자족의 영성 (0) | 2021.07.04 |
진정 두려워해야 분! (0) | 2021.06.20 |
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새로운 존재! (0) | 2021.06.13 |
환경주일을 맞아 (0) | 2021.06.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