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 교우들 중에는 코로나 확진자가 없습니다만, 가족이나 지인 중 누가 코로나에 걸릴지 모를 정도로 옆에 와 있어 아차하면 감염되는 상황입니다. 무더위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교우 여러분 모두 방역지침 잘 지키시며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코로나 이전이라면 한참 여름수련회나 성경학교 준비로 바쁜 때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 해도 코로나로 인해 수련회나 여름성경학교를 못하는 상황이지만, 여름성경학교는 8월 중에 온라인으로라도 해 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어제 저녁에 여러분들에게 공유해 드린 그레타 툰베리 동영상이 제가 나눌 설교 이상으로 이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저녁에도 공장식 사육으로 길러진 닭요리를 먹는데... 평소 채식 중심의 식단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육식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됩니다. 안 보신 분들은 꼭 보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31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여름 수련회 주제 성구로 잘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쉼을 갖고자 했던 예수님의 일행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33-34절, “33 사람들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 나와 육로로 해서 그들을 앞질러 그 곳에 갔다.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셨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달려 나와’라는 표현이 마음에 담겼습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를 보면, 병자들을 데려 오려고 뛰어 다니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예수님께 달려 나왔을까요? 이렇게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온 군중을 마르코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식민지 백성들입니다. 삶의 기반인 토지도 없습니다. 일자리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삶의 소망, 살아가는 이유, 의미가 없습니다. 자존감도 없고 마음과 육체에 병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인생이라는 고해에 던져져서 먹고 마시는 것을 해결해 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사람들입니다. 당시 갈릴리 백성들이 대부분 이러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가 ‘오클로스’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통 복수대명사 ‘라오스’를 사용하는데 마르코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라오스와 구별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겁니다.
‘오클로스’는 ‘하느님 백성’이 아닌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라오스’는 우리 편이고 ‘오클로스’는 우리 편이 될 수 없는 버려진 이들, 함께 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같은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이 내린 해석으로 넘어설 수 없는 차별의 선을 만들어냈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있던 때, 힘없는 이스라엘 군중들은 버려진 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 속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비극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로 읽은 예레미야 23장을 보십시오. 1절, “이 저주받을 것들아, 양떼를 죽이고 흩뜨러 버리는 목자라는 것들아. 2절, 내 양떼를 돌보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흩뜨려서 헤메게 하니...”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할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목자는 제자상 예언자 등 종교적인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신정일치 사회인 이스라엘에서 왕과 정치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워진 지도자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아 하느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수님 당대에는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갔습니다.
지난주와 이번 주 성서통독365로 예레미야를 읽고 있는데, 9장 23절에 목자들이 가장 우선해야 하는 하느님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23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뜻을 깨치고 사랑과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일이다. 야훼의 말이다.”
사랑-헤세드, 법-미슈파트, 정의-쩨다카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목자들로 하느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뜻을 깨쳐 하느님의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를 펼치실 참된 목자인 메시아가 오신다는 예언했습니다. 바로 그분이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 오클로스를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측은히 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인데,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창자는 마음이 머무는 가장 깊은 자리로 생각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다.’ 말할 때 ‘애’가 창자입니다. 영어로 컴패션. “함께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오클로스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애태움 그 자체입니다. 이 시대, 코로나로, 무더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이것입니다.
측은지심을 지닌 예수님의 눈에는 가장 먼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34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에서 “보다”라는 단어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목하여 보는 것’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쉼을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온 예수의 일행을 쫒아온 군중들입니다. 예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귀찮아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환대하셨습니다. 자신을 찾아 이렇게 모여 있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의 필요를 이해하셨고 그들을 존귀하게 대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비전을 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묶임을 끊어내어, 존귀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을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 53절 이후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다시 쉼을 갖기 위해서 베싸이다라는 곳으로 배를 타고 가셨는데, 중간에 풍랑을 만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겐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예수님의 일행을 알아본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 앞에 병자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환대하시는 예수님은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 나라가 임합니다.
측은이 여기는 마음이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능력입니다. 감사성찬례를 봉헌하는 우리 안에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측은지심, 주님의 마음입니다.
비대면으로 영상예배를 드리게 되어 주님의 성체와 보혈을 모시지 못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이 성찬례를 통해 우리 안에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이 부어지고 충만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1독서 예례미야의 예언처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고 하느님 나라의 소망을 주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묶임을 끊어내어 존귀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고자 오신 메시아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메시아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고,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 에페소서는 시대 속에서 메시아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가 어떠해야하는지 그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교회는 ‘새 민족’입니다.
15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개역성경에서는 “한 새 사람(one new man)”이라고 번역합니다. 새 민족, 새 사람이란 다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일구어 가야 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택함 받는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고 자신들 외에 모든 민족을 상종조차 하지 않으며 차별하였습니다. 이방인이란 배제와 차별 속에 살아가는 백성들을 다 아우르는 표현이 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인 메시아 공동체 교회는 그 어떤 차별이나 배제 없이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 환대하는 공동체입니다.
2. 그래서 교회는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16절,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사도 바울로는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4:3,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버전으로 말하자면, “인종이나 성별이나 학벌이나 직업이나 계급이나 이주민이나 성소수자나, 그 어떤 것으로도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3. 교회는 한 시민입니다.
19절,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여기서 시민이란, “하느님 나라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사탄의 가치와 문화가 다스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거듭 확인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원리가 무엇이라고 했죠? 아까 인용했던 예레미야 9장 23절 말씀대로 사랑과 공평과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세상의 빛이 교회입니다.
4. 교회는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가족입니다. 가족 안에선 부모, 형, 누나, 동생, 어린 아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도 있고 부족함도 많습니다.
영적인 부모들이 바로 서 있을 때, 가족은 사랑으로 화해하고 하나 되어 쉼과 회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됩니다.
저와 교회위원을 비롯한 섬김이들이 영적 부모로 바로 서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5. 교회는 “신령한 하느님의 집”입니다.
22절, “여러분도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란 성전을 말합니다. 성전이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곳이듯이,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릴 때 하느님께서 임재하시어 죄 사함 은총이 가득하며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메시아 공동체인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자 예수님께서는 13절 “피를 흘리셨고”, 14절 “자신의 몸을 바치셨으며”, 15절 “자신을 희생하셨고”, 16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됩니다. 이토록 교회는 위대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교회의 건강함을 측정하는 것이 여러 지표가 있는데, 가장 단순하게는 교회 재정의 투명성과 건강성을 봅니다. 이 점에서 성공회 분당교회는 작지만 건강한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보 간지로 상반기 재정보고가 있는데, 상반기까지 예산을 달성했고 무엇보다 월세와 관리비 등 엄청난 고정지출 비용에도 불구하고 선교구제를 위하여 15% 정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분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입니다. 이 세상을 섬기라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시며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측은지심으로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을 바라보시며 그에게 나오는 자들을 치유하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메시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시어 구원의 은총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의 존귀함과 위대함으로 바로 알고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세상의 빛으로, 환대의 영성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복음 공동체를 세워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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