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청지기의 교훈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9월 15일 연중 24주일 설교 말씀)
소설 ‘도가니’에서 장애인들이 학대받는 현실을 감추려는 불의한 세력들의 엄청난 협잡과 음모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작가 공지영은 이렇게 씁니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 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곳으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진리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바른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엄청난 불의의 지배를 참고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강요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실이 게으르고 교만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약은 청지기의 이야기는 게으르고 교만한 ‘진실’에게 좀 더 부지런하고 지혜롭게 되기를 권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축내다가 발각되어 해고 통고를 받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인의 장부를 정리하면서 민첩하게 실직 대책을 세웁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주인에게 진 빚을 감해주고 탕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쫓겨났을 때 보살펴 줄 동료들을 만들었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비양심적이고 교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사람을 칭찬합니다. 아마도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인 처사보다는 재빠르게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슬기로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위기에 처해 있는, 종말의 심판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민첩한 대책이니, 빨리 회개의 결단을 내리라는 말씀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게으르고 우둔하게 있는 것이 미덕일지는 몰라도 위급한 시기에는 그것이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사필귀정만 믿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 하셨습니다. 재물을 현명하게 관리하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면 누가 참된 재물을 맡기겠습니까? 세속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은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자선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으니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거나 자선을 베풀어서 ‘이웃’을 사귀는 것입니다.
재물은 가치중립적입니다. 그러나 누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소유하느냐에 따라서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칼을 어머니가 사용하면 생활에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이고 강도의 손에 쥐어져 있으면 흉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 그 사람을 오히려 속박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는 사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선과 사랑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유리(주)의 최태섭 회장은 재물을 통한 선행의 모범이 된 분입니다. 그는 한국전쟁 시절 대다수가 피난 가는 난리 통에 은행에 가서 만기가 된 빚을 갚았습니다. 은행 직원이 전쟁 중에 보다시피 장부도 모두 태우고 있는데 굳이 돈을 갚을 이유가 뭐냐고 하는데도 끝내 돈을 갚고 영수증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원양어업을 시작하려는데 돈이 없어 고생할 때 은행에서는 그를 알아보고 그의 신용을 믿어 무담보로 2억을 빌려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돈을 벌었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교육 사업에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며 재물을 현명하게 사용한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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