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톤먼트(atonement, 속죄)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4월 13일 고난주일 설교 말씀)
화려하게 피었던 봄꽃들이 바람에 휘날립니다. 일제히 피어나고 일제히 사라지는 꽃들이 조금은 허망하게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꽃이 사라진 나뭇가지에는 다시 열매를 맺을 꿈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 꽃이 그대로 남아있는다면 아마도 열매에 대한 꿈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 자연의 준엄한 법칙 속에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고자 결단하는 고난주일입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수난복음은 은전 서른 닢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후의 만찬, 예수를 절대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베드로의 장담, 예수께서 외로이 고통스러운 기도를 올리는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기도, 가야파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는 장면,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 가시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을 가는 예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예수로 이어지는 한편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이를 통해 인류사에서는 구원을 이루는 크라이막스이면서, 인간의 죄를 돌이켜보는 거울로서의 사건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친숙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이 아니더라도 액세서리로 몸에 지니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수난복음을 마음으로 읽는다면 그것이 그리 쉽게 선물로 주고받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안에는 무수한 인간의 배신과 음모와 교만이 담겨있고, 예수의 피눈물 나는 고통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한 죽음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를 희생양으로 이해한 까닭입니다. 고대 사회의 제의에서 죄 지은 사람이 희생 제물을 신에게 바침으로서 그 죄를 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데 그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을 죽임으로서 봉헌자의 죄도 죽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죽을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제물이 죽는 셈입니다. 우리는 성찬예식에서 이를 늘 되뇌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이 대표적입니다.
속죄 제물로서의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일 그 교리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죄의식보다는 부채의식이 더 강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 마땅할 나대신 예수께서 대신 죽어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채무이고 짐입니다. 무거운 짐을 다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짐을 우리가 짊어지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예수께서는 죄 없이 십자가를 짊어지면서도 자비와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 고대 사회의 잔인한 형벌인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의로움과 평화를 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고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닮지 못한 채, 대속의 십자가만을 바라 볼 수 없습니다. 아무런 통회 없이 제물만 바침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의 진정한 통회는 그리스도의 자비심을 마음과 삶 속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아가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속죄’(atonement)는 ‘하나 됨’(at-one-ment)입니다. 그것은 대속교리를 무의미하게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이웃이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물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듯하게 맞아주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는 것이 바로 예수께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통해 진정으로 통회하여 하느님과 상통하는 길입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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