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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귀향

by 분당교회 2015. 9. 29.

귀향


많은 사람들이 귀향길에 오릅니다. 명절만 되면 고속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하고 선물을 배달하는 택배 기사들은 분주하게 이 길 저 길을 다닙니다. 뉴스 화면에서는 선물 보따리를 들고 늙으신 부모님을 찾는 행복한 모습을 거듭 보여줍니다만, 이 시대의 명절은 그다지 유쾌하거나 따듯하다는 느낌이 적어진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에 가려진 뒤편에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를 포기했다고 해서 삼포 세대라 이름 지어진 젊은 세대들에게는 오랜만에 만나는 어르신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취직은 언제 하니?’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만나는 사람은 있냐?’ ‘아이는 언제 나으려고 그러느냐?’ 어른들은 당연히 걱정이 되어서 하는 질문이지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사자들이야말로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것을 성취하기에 너무나 힘겹기 때문이고 때로는 포기 하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라는 새로우면서도 씁쓸한 인생관으로 도피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귀향길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싸움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은 고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만 인간의 존재가 한낱 상품화된 자원으로, 노동력으로, 거대한 기술개발과 이윤추구의 도구로 존재하는 한 모두가 고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상품적 가치를 지니고 사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준거가 된다면, 그것이 또 행복의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존재의 뿌리를 박탈당하고 사는 실향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고향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의 소유와 사회적 지위와 성취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인간 본연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다면 마음속의 부담과 상처는 능히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사람들은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며,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며,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 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수단으로 취급당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인권 사상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예수께서는 사회적 약자로서 버림받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들을 존중해주고 그 존엄성을 인정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추석의 보름달은 둥글고 환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일 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달이 밤하늘을 밝힐 때 최고의 명절로 지키면서 화해와 용서와 기쁨의 축제를 벌인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고된 노동으로 땀 흘린 여름을 보내고 풍성한 곡식들과 과일들을 거두어들이는 이 시기야 말로 가난과 상처를 씻기에 적절한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상처 입히고 한숨짓던 일상을 잠시 멈추고 훤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가슴과 가슴이 부딪히는 애정과 행복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조상들을 기억하며 감사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생과 사를 초월하는 절대자 앞에서 겸손을 배우고 희망을 빌었습니다.


명절은 괴로운 날이 아니라 희망과 위로를 나누는 날입니다. 날선 추궁과 쑥덕거림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면서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는 가운데 신뢰와 사랑을 체험하는 날입니다. 


귀향길은 위치의 이동만이 아니라 영적인 본향에 함께 가는 길입니다. 행복은 밖에서 얻어내는 것보다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더욱 깊은 것이라 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만남이 아니라 영적으로 충만한 명절이 되도록 기도와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떠들썩한 명절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9월 27일 연중 26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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