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낭비- 경제로부터의 자유
어떤 실리나 보상 그리고 효율을 기대하지 않고 투자를 한다면 낭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급적 낭비를 줄이려고 합니다. 그 어떤 분야에 투자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는 공부를 해도 그 어떤 반대급부를 얻을 것을 기대합니다. 하다못해 선물을 줄 때도 상대방의 감사하는 마음이라도, 또는 상대방의 호감이라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길을 갈 때에도 가급적 적은 노력으로 짧은 길로 빠르게 가려는 효율을 계산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많은 행위가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는 경제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합리적인 이유와 타당성이 없으면 행동의 동기가 없어지고 무의미한 일로, 시간과 재물과 정력의 낭비로 치부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서에는 낭비의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무 조건 없이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이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은 비극적인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모세와 하느님에 대들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을 때는 잠자리와 먹을 것에 대한 실리를 생각했습니다. 광야를 가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이르러서는 그 낭비의 절정을 이룹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하늘의 거룩한 보좌에서 세상을 감시하고 평가해서 심판하면 될 것을 가장 낮고 비천한 마구간에서 출생을 하고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유혹을 물리친 것은 경제 논리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급기야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그야말로 ‘낭비’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예수를 본받아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박해받는 입장으로 대전환을 합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은 매우 행복한 사나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인간이 추구하는 경제적 행복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낭비를 ‘거룩한 낭비’라 부릅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향유를 바르는 마리아)
예수께서 만찬에 참석하였는데 마리아가 갑자기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것을 본 가리옷 사람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데 매우 아깝다고 투덜거립니다.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리옷 유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보다 오히려 한 번이라도 따듯한 밥 한 끼를 대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선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이 행위를 두고 자신의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참견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거룩한 낭비를 인정한 것입니다. 마리아인들 가리옷 유다처럼 생각할 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내가 어떻게 장만한 것인데...’하면서 애지중지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의 일 년 연봉에 해당되는 값비싼 향유를 아마도 꼭꼭 숨겨놓고 간수했을 것입니다. 그 향유를 일거에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묻은 먼지와 땀이 마리아의 향유와 머리털로 깨끗이 씻어집니다. 그 향기가 온 방 안에 가득 찹니다. 마리아 부은 향유에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어떤 경제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숭고한 가치가, 자유로운 영혼이 그 향유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은 실리로 따질 수 없고 반대급부를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랑이 그래서 안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집착하는 마음을 부은 것입니다. 자기를 얽매이게 하고 괴롭게 했던 그 집착을 버리고 나니 영혼이 자유로워지고 순수한 섬김의 신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마음은 세상을 향기로 채웁니다.
우리는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부터 경제를 배우고 이를 삶의 원칙을 삼습니다. 눈만 뜨면 ‘경제 살리기’, 귀만 열면 성장, 개발 등등의 말을 접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세상은 살기 힘들어지고 기쁨이 없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왜일까요?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낭비가 원천봉쇄 되어 어떤 창조적인 시도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밥만 먹여주면 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낭비를 통해 구원을 얻습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3월 13일 사순 5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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