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열매
작년 연말 뉴스에 종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라는 말이 나왔을 때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일 양국 정부가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된다고 하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일본 정부 책임자가 사과를 하고 100억 원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사업에 제공한다는 것으로 마침내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타결을 했다고 하는 소식을 접하고는 과연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 일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할머니들이 받아들일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합의로 말미암아 다시 정신대 할머니들의 피눈물 나는 증언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의 사과는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것이라는 것이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피해자라는 말조차도 사용하기를 꺼려하고 아무 잘못 없다는 태도가 변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 혐오의 목소리가 당당하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십 여 년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밀양’이 떠오릅니다. 남편을 잃고 외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내려가 정착하려던 신애에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듯한 참변을 당합니다. 아들 준이가 유괴되어 살해된 것입니다. 극심한 좌절 속에서 이웃의 도움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고 정신적인 위안을 얻게 됩니다. 신앙인이 된 신애는 유괴 살해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수감된 교도소에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살해범은 자신이 회개해서 하느님을 영접하고 용서를 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용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루하루가 평화와 기쁨 속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는 그 소리에 신애는 주저앉고 맙니다. 그리고 항변합니다. ‘하느님이 용서를 하셨다는데 어떻게 내가 다시 용서를 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하느님이 어떻게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영화 밀양의 한 장면, 교회 부흥회에서 아들을 읽고 통회하는 신애)
(영화 밀양의 한 장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살인범)
과연 살해범은 용서 받았을까요? 아니면 용서받았다고 착각하면서 자기 위로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살해범의 회개는 진실하지 못한 회개요 가식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풀지 못하면 하늘에서도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요즘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도련님입니다. 그가 군에 있을 때 잠시 들른 고모 집에서 양녀 겸 하인으로 있던 카츄샤를 쾌락의 도구로 삼아 강간합니다. 그리고 100루블을 쥐어줍니다. 그 일로 카츄샤는 임신을 했고 한없는 타락과 고통의 세월을 살게 됩니다. 결국 창녀가 된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고 시베리아 유형을 가게 됩니다. 네흘류도프는 재판정에서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죄로 인해 카츄샤가 엄청난 고통을 받고 결국은 시베리아 유형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에 자책하게 됩니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구명운동을 했지만 실패합니다. 진심으로 카츄샤에게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결혼해 줄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카츄샤는 냉랭하게 거절하고 유형길을 떠납니다만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유형 길에 동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변화되었더니 세상이 달라져 보이게 됩니다.
진심으로 하는 회개는 이렇게 새 삶의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단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며 삶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표현을 따른다면 탐욕과 어리석음과 무의미에 쩌든 ‘제 나’가 ‘얼 나’를 만나 하느님의 품에 안기고 ‘참 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어 회개할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고 기다렸으나 삼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자 포도원지기에게 잘라 버릴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포도원 지기는 금년 한 해 동안만 그냥 두어 달라고 사정하자 주인은 일 년을 유보합니다. 심판에 대한 유보입니다.
회개라는 나무에는 열매가 맺게 마련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회개한 것을 행실로 보이라!’고 했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영적인 거듭남이요 참 된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이요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회개는 본인은 만족하고 좋은지 모르나 하느님과 이웃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판이 유보되어 있는 상태이고 또 그 날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2월 28일 사순 3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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