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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그러나

by 분당교회 2016. 2. 10.

그러나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베드로의 이 한 마디는 신앙인들의 순명이 어떠한 것인가를 가장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으로 나름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어느 때 어디에서 쳐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깊은 밤에 호수 언저리에서 그물을 치는 것이 대대로 내려온 고기잡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예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하신 말씀은 기존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시도 또는 도전을 하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은 그냥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사고를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방식이 반복되는데 기존의 방식만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할 용기와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낡은 가치와 방식을 고집하면서 다가오는 새 시대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라파엘로 산치오, 고기잡이 기적 1515)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분이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거나 아니면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밤새도록 지치도록 일을 하고 이제는 그물을 씻고 쉬러 들어가야 하는 시간에 다시 배를 몰고 나서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하겠다고 나섭니다. 매우 충성스러운 모습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납득할 수도 없는 일에 기꺼이 나선다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는 역접입니다. 그 동안 흐르던 맥락이 ‘그러나’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평온한 흐름이었다면 ‘그러나’ 이후에는 급격한 반전이 이루어져서 험난한 흐름으로 바뀝니다. 그동안 매우 고통스러운 흐름이었다면 이제는 평화와 안식의 흐름이 되겠지요. 그동안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러나’ 이후로는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서에서는 끊임없이 ‘그러나’를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 살이 된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성취시키셨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백성들이 자유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 그들을 해방의 여정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천대받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존귀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귀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죄인들의 손을 잡고 병자들을 치유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러나’는 암흑 속에 숨 죽여 사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단어입니다.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나’는 영생과 축복을 알리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기득권을 누리면서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험천만한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이고 죽으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들에게 ‘그러나’는 아주 불순한 단어인 것입니다. 평탄하게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안일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의 단어가 됩니다. 


베드로는 이 ‘그러나’를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옳고 그른 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문이 들고 회피하고 싶겠지만 말씀 하시는 분이 그분이라면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남들이 다 외면하고 배척하는 일이라도 주님이 가라고 하면 그대로 가는 것이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옳은 분이고,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수많은 이유를 들이대면서 하느님의 명령에 저항하려고 합니다. 무엇이 합리적이고 무엇이 다수에게 이익이라는 것을 핑계로 정와와 사랑의 길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과학 문명의 시대에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 반전의 순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2월 7일 연중 5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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