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유혹
예수께서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는 과정을 두고서 여러 문인들이 글을 써 왔습니다. T. S 엘리엇은 시극 ‘대성당의 살인’에서 순교를 앞 둔 베케트 대주교에게 유혹자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세 번의 유혹을 받은 것처럼 물질과 권세와 명예에 대한 유혹에 덧붙여서 엘리엇은 의도적으로 순교함으로서 성인이 되라고 말하는 네 번 째 유혹자를 등장시킵니다. 베케트 대주교는 이 유혹자야말로 가장 교활하고 견디기 힘든 유혹이라고 말하며 물리칩니다. ‘선한 결과를 예측한 불순한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 ‘대신문관의 전설’이라는 대목 속에서 예수가 악마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서 인류를 더욱 풍요롭고 고통 없이 살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예수를 심판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와는 패턴이 다르지만 독일의 문호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간의 본성과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는 파우스트 박사에게 유혹자 메피스토텔레스가 나타나서 세계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탐닉하고 쾌락을 즐기고 나서 어느 순간에 이르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라고 외치면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아간다는 계약을 체결합니다. 파우스트는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신화 속의 여인과 결혼도 하는 향락을 누리기도 하고 이상적인 나라의 번영과 복지를 위한 일도 성공적으로 합니다. 그리고서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외칩니다만 악마는 결국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아 가는데 실패합니다. 신은 인간의 순수하고도 진지한 노력과 남을 위한 마음을 결국은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세계 기독교계는 경악을 했습니다.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책을 로마 교황청에서는 금서로 지정했고, 그리스 정교회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파문했습니다. 개신교회는 악마의 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만 한국에서는 기독교계의 격렬한 반대에 봉착해 이 영화를 15년이나 지나서야 상영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유혹, 1222년 경)
루가 복음서에서는 특이하게도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루가 4: 13)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물질과 권세와 명예에 대한 유혹 말고 다른 유혹이 하나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카잔차키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극한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유혹을 받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기진맥진 해 있을 때 예수께서는 잠시 혼절을 합니다. 환상 속에서 수호천사가 나타나서 이제 그만 십자가에서 내려가 평범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하늘의 천사도 인간의 평범한 삶을 동경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으면서 평범하게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이것이 악마의 유혹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안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퍼부었지만 카잔차키스의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생각할 때 그냥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이야말로 가장 큰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이 도전에 직면한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신앙인들의 영적인 싸움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의 주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줄곧 지켜보고서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죄는 지극히 평범하고 무지한 인간인 죄라고 했습니다. 즉 아이히만은 평범한 가장으로서 충실한 사람이며 일개 상사에서 총통이 된 히틀러의 성공을 보고 감탄하는 매우 범속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여러 사람들을 고통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는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그의 ‘무의식의 죄’ ‘악의 평범성’이야말로 진정한 죄라고 한 것입니다.
악마는 기울어지는 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외쳤습니다. 급박한 상황, 불의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그저 평범하게 가만히 있으라고 속삭이는지도 모릅니다.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자신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 살면 그만이라고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고 흔히들 말합니다만, ‘악마는 평범함 속에 있다.’는 말도 성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2월 14일 사순 1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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