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촛불
어둠을 밝히는 빛에는 내 몸 안에 있는 빛이 있고, 내 몸 밖에 있는 빛이 있습니다.
몸 안에 비치는 빛은 무지의 먹구름을 거두어내는 빛입니다. 사람으로서 살아야 할 이치를 깨닫는 것이고, 마음속에서 진리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또한 절망과 슬픔에 빠져있을 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외로움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사랑이 바로 몸 안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삶이 공허하고 보람도 의미도 찾지 못하는 인생의 방황 속에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하느님의 빛 역시 그렇습니다.
몸 밖에 있는 빛은 우선 우리 일상생활을 돕는 조명 기구의 빛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 저 편에서 검붉은 여명을 일어 올리는 태양이나, 밤하늘을 수놓는 별빛이나, 지금도 토끼가 절구를 찧을 것 같은 달빛을 보고 단순히 조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많은 음악과 문학에서 또는 신화와 전설에서 나타나는 이 빛들에는 인간의 마음이 투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불공평하고 불의한 권력이 백성들을 탄압할 때,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억압하고 살육하는 어둠 속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역시 시대와 역사를 밝히는 불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불빛을 생각할 때는 조명으로서의 의미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음속에서 바라보는 빛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의 불빛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촛불일 것 같습니다. 모든 종교의례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촛불입니다.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절에서도, 심지어 무당이 굿하는 곳에서도, 각 가정에서 조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낼 때도, 뿐만 아니라 결혼식 같은 기쁜 행사에서도 촛불은 빠지지 않습니다. 촛불을 켜야 의식이 진행되고 촛불을 끄면 의식이 종료됩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고백하고 약속할 때도 촛불이 두 사람의 눈동자 속에 타오릅니다. 분위기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촛불을 켜지 않습니까?
이렇듯 촛불은 조명 도구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를, 또는 초월적인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로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가끔 텔레비전을 끄고 촛불을 밝히며 그윽한 차 한 잔 하면서 가족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촛불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어둠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는 빛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촛불을 밝힘으로서 우리 곁에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죄와 죽음과 어리석음의 어둠을 삼키는 진리의 빛을 바라보며 우리 정신과 마음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자신을 녹이며 빛과 따스함을 주는 양초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촛불은 이웃에게 나누어주면 줄수록 세상은 더욱 밝아집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빛이 줄어들거나 쪼개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리입니다.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기쁨은 더 커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역시 나누면 나눌수록 커질 뿐입니다. 줄어들지 않습니다.
양초가 자신을 스스로 태우지 않는다면 빛은 밝혀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함으로서 인류에 구원의 희망을 주셨음을 기억하며 우리는 각자의 촛불을 밝힙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며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가 하느님 앞에 봉헌되어졌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 산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김의 삶을 통해 한 가닥의 빛이 됩니다.
2월2일은 성탄 후 40일째가 되는 날로서 ‘주의 봉헌’ 축일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규정에 따라 예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 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 우리 교회에서는 양초를 축복하는 예식을 거행합니다. 이는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할 때 성령을 받아 성전에 갔던 시므온이 예수를 세상을 밝히는 구원의 빛이라고 예언한 것에서 유래가 되어 행하는 것입니다. 이날 성찬예배 중에 복음 성경 낭독과 축성기도 때 회중들은 각자 손에 든 양초에 불을 밝힘으로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시므온은 예수를 안고 노래했습니다. ‘주여,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길고 긴 세월 동안 기도하며 기다리던 구세주를 한번 본 것으로 이제 여한이 없다는 고백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 한마디의 고백을 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시므온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불꽃이 타고 있었을 것 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월 31일 주의 봉헌, 연중 4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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