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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세례와 정체성

by 분당교회 2016. 1. 10.

세례와 정체성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가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질문 역시 인간의 근본적이고도 영원한 숙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평생을 살아도 풀리지 않는 이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구하기는 어렵지만 성숙한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가령 부모는 부모답게 어떤 역할과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하든지, 정치인이면 사회지도자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종교인이면 그 종교인으로서 어떤 도덕성과 계율을 지녀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각자 자기가 어떤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고 또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인간상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어야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냥 어린이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매우 무책임하고 소아병적인 양상을 보일 것입니다. 육체적 성숙에 정신이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여정의 전환점마다 통과의례를 합니다. 가령 출생에서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의 입학 그리고 졸업을 거치며 자신의 성장을 인식하고 그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또한 성인이 되면서 투표권이 주어지고 사회적으로 성인대접을 받게 됩니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을 기념하면서 한 살 더 먹은 사람으로서 과거와 좀 더 성숙한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하게 됩니다. 특히나 결혼식 같은 경우는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도 중요한 전환을 이루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식 이전과 이후의 생활이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또 본인의 의식 속에서 새 가정을 꾸려 책임적인 생활을 하는 근본적인 태도에서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영웅들의 신화에서는 예외 없이 기존 공동체의 삶에서 분리되고 격렬한 고난과 맞서 싸운 뒤에 비로소 새 인물로 거듭나 귀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개 고통을 통해 상징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새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종교인들에게도 이런 과정은 필수입니다. 대표적으로 한국 전통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무교(巫敎)에서 무당들이 무병을 앓고 신 내림 굿을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의 성직자들도 일정 정도 세상과의 단절과 수련의 과정을 거치고 다시 공동체로 귀환함으로서 성직자로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예수의 세례, 페루기노와 핀투르키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거듭나는 의식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 역시 상징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새 삶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교리에서는 세례를 통해서 원죄를 씻는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무죄한 인간이 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동체와 하느님 앞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을 했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다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또한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짐으로서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 앞에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례 이후에 지속적으로 충실한 교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가장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세례를 통해 얻은 신앙적 체험은 언제든지 충실한 교인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세례자 요한 앞에 나아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년 예수가 지녔던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이 이제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동체가 인식하는 정체성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목수의 아들로서의 과거는 죽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로 다시 태어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께서는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거듭난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세례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엄청난 자격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그 특권을 누릴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서의 사명과 책임도 더불어 받게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월 10일 주의 세례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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