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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두 명의 행운아

by 분당교회 2016. 3. 21.

두 명의 행운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길목에 두 사람의 행운아가 있습니다. 바라빠와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바라빠는 소요를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무력으로 유다의 독립운동을 하던 열심당원일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입니다만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석방하는 관습에 따라 빌라도는 내심 죄를 찾아 볼 수 없는 예수를 석방할 요량이었으나 군중들은 바라빠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할 때에는 다윗의 왕권을 다시 세워줄 영웅으로 기대했었지만 실제로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의향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바라빠는 뜻 밖에 엄청난 행운을 맞이한 것에 틀림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자신은 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나 또는 소설과 영화에서 바라빠가 나중에 회개하여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만 바라빠의 석방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행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 덕분에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침몰하는 세월호 속에서 구명조끼를 벗어서 친구에게 주고 대신 죽은 학생 교사 등과 같은 경우가 극단적인 상황이겠습니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멀리 또는 가까이서 보이지 않게 희생하는 사람들이 땀 흘려 수고하고 있고 이 정글 같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경쟁에 밀려난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덮어주기에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한 순간도 감사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내가 저렇게 되지 않아서 감사하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 순간 한 순간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토 디 본조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키레네 사람 시몬은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던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엉겁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해골산까지 간 사람입니다. 그 언젠가 백인대장이 예수께 자기도 사람들한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하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면 로마 군인들은 아무나 붙잡고 궂은일을 시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심한 매질을 당했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다가 탈진해서 넘어지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으니까 로마 병사는 아무나 붙잡아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것입니다. 로마 병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건강한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시몬은 그야말로 재수 없게 얻어 걸린 것입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을 다 재껴두고 엉뚱하게 사형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생을 해야 한다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저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나일까? 억울한 생각도 들고 또 사형장이라고 하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 곳으로 가는 불쾌함까지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는 행운아라고 보기에 어렵습니다. 바라빠와는 완전히 반대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선생님이 무엇을 시킬까봐, 또는 질문을 할까봐 일부러 눈길을 피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군대에서는 작업, 훈련 등에 가급적 뽑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조마조마 했던 순간, 그리고 마침내 다른 사람들이 뽑혀나가면 안도의 숨을 쉬었던 것은 다녀온 사람들의 공통된 추억일 것입니다. 


느닷없는 불행과 사고 또는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하필이면 나일까? 백화점이 무너지고, 지하철이 불타고, 수학여행 가는 배가 침몰해서 참사가 벌어지는 원인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왜 하필이면 사랑하는 가족이 현장에 있을 때 사고가 발생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이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시련과 고통, 의로운 사람들이 박해받는 현실 등등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고난의 신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험에 빠진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을 구해 줄 사람이 나밖에 없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책임을 맡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가족이 장애가 있다든지 뜻하지 않게 무거운 짐을 져야 할 경우 역시 많습니다. 이것을 행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 기대고 순종하는 가운데 위로와 희망을 얻을 뿐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의 이름이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 시몬 베드로와 동명이인입니다. 무슨 절묘한 조화인지...

후에 그는 매우 충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가족 특히 아들 루포 역시 바울이 신실한 사람으로 믿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진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세간에는 그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순간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꽤나 설득력 있는 상상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영광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의 빛은 더욱 환하게 우리 앞을 비출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3월 20일 성지주일/고난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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