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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예수님의 숨결

by 분당교회 2016. 4. 3.

예수님의 숨결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어놓고 숨었다고 했습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웠다고 했지만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예수의 동료라는 것만으로도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야 있지만 전체적인 정황이 그렇게 긴박한 것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그들은 그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인들이 제자들을 색출해서 탄압하려고 했다는 증언은 없습니다. 오히려 아리마태오 요셉이나 니고데모 등이 침향을 섞은 몰약을 가지고 와서 장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안식일 새벽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그 무덤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몰래 숨어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낀 것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양심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있어도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죄책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과거에 대한 후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해서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 새벽에 이미 그 소식을 들었고 또 몇 명이 달려가서 그 빈 무덤을 확인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들이 배반한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는 것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도마, 카라바지오 1602년)


제자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은 죄라고는 예수께서 고난 받는 현장에서 모른 척하고 도망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죽을죄를 지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모자랐고 나약했고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모든 불안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보여 집니다. 예수로부터 등지고 멀리 떠났을 때,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지 못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환대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과 박해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세상 걱정거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 나약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배신한 제자들을 욕하거나 응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숨결을 불어넣어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아주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문을 꽁꽁 닫아걸고 멀리 도망친다 하더라도 내면에서 스믈스믈 올라오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인데 예수께서 이들에게 평화의 숨결을 넣어주셨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숨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숨결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 신앙과 기도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숨결을 가슴에 채우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장에 없던 토마는 그 숨결을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인간적인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토마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확신을 갖기 위해 합리적인 의문을 가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나 질문 없이 믿는 것이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믿는 것이 오히려 기초공사 없이 지은 집과 같이 쉽게 허물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종종 신앙의 깊이 없이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머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문과 회의와 고뇌 속에서 자신의 껍질이 벗겨나가면서 깨달음이 쌓여 나갈 때 우리는 보다 진실한 신앙인으로 성숙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한 밤 중에 찾아 온 니고데모의 의문에 대해, 토마의 회의에 대해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가르치시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형상으로서의 예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믿음으로, 죽음마저도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을 가두어 버릴 수 없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를 그 신앙의 경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4월 3일 부활 2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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