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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by 분당교회 2016. 4. 1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자들 몇몇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대화를 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등하고 번민했던 것 같습니다. 도무지 답을 구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아마도 무거운 침묵을 흘렀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하자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라고 하시자 어부들은 그대로 하여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이 때 ‘저 분은 주님이시다.’하고 깨닫고는 겉옷을 입은 채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 곁으로 옵니다. 언젠가 물위를 걸을 때 사나운 물결을 보자 겁이 나서 물에 빠졌던 경험이 있지만 이번에는 그냥 뛰어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보다는 기쁨에 넘쳐 예수께로 달려옵니다. 예수께서 재판 받으실 때 그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조롱받고 고통 받으실 때 현장에서 도망친 베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나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고기잡이나 하겠다고 나섰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번 선택한 사람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다가온 제자들과 예수께서는 빵과 생선을 함께 잡수시고는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내 양을 잘 돌보아라.’라며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같은 질문을 두 번 더 하십니다. 세 번째 질문에 이르러서 베드로는 매우 섭섭했는지 ‘제자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라파엘로 산치오, 기적적인 어획량, 1515년)


베드로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께서는 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네가 도망친다고 해서 내가 너를 포기할 것 같으냐?’ ‘부활한 나를 만났으면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나의 길을 따라야지 고기잡이로 돌아간다니 말이 되느냐?’ ‘그래, 네가 나를 떠나서 그동안 무엇을 했냐? 행복했냐?’ 이런 식으로 추궁하며 질문하실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사랑만을 물으십니다. 그것은 모든 신앙인과 공동체가 가져야 할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내 양’을 맡기십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은 예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지도자를 바라보는 본질적인 시선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소중히 여깁니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을 것입니까? 결과를 좀 보여 주십시오!’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질문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합당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에게서 ‘멋쟁이’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유머에 능숙하고 좌중을 울리고 웃기고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을 요구합니다. 물론 이런 능력이 복음을 전하는데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유명 목회자들에게 때때로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비리 또는 추문에 휩싸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는 예수를 사랑 한다고 하면서 권력과 명예와 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목회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아무리 지도자라 하더라도 예수 사랑이라는 본래의 궤도를 이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교회 역사 중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는 때때로 사랑 대신에 힘을, 십자가 대신에 지배력을, 인도받기보다는 인도하려는 유혹을 받아 온 사람들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친밀함을 두려워할 때 힘에 대한 유혹이 극대화된다는 것입니다. 건강하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법을 모른 채 힘과 지배력만 내세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리더십을 행사합니다. 기독교 왕국을 세우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라고 강조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기 어려운 까닭은 사랑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목적 그 자체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4월 10일 부활 3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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