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무덤을 열라!’
예수께서 비통한 심정으로 한 무덤 앞에 섰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시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 그냥 무덤 문을 열고 라자로를 일으키시면 될 것을 그 앞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서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의 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며 공감입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형제의 죽음 앞에서 통곡을 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예수에게서 기적만 바랄 뿐입니다. 단지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이, 그리고 죽은 이로 말미암아 애통하는 사람들과 한 입장이 되고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기적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다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서 있는 예수님처럼 죽음 앞에서 몸서리 처지는 애통함을 느낍니다. 재작년 2014년 4월 16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참사를 겪었습니다. 476명의 승객을 태운 세월호가 진도 앞 바다에서 침몰해 가는 과정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보았습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304명이 수장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했던 안타까움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단순히 어린 학생들이 죽어서만도 아닙니다. 304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서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의 자연재해나 사고로 인해 이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경우는 많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고 함께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이 사건이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말할 수 없는 우리 사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뿌리 깊은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기주의와 맘몬 숭배에 치우쳐 있는가, 악이 오히려 평범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영혼과 양심이 타락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에 교회와 신앙인들은 깊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피해자 중에 아직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단원고 학생의 아버지는 봄이 오는 것이 무섭다고 합니다. 피어나는 꽃들을 쳐다보기도 싫다고 합니다.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세월호에 탔다가 탈출한 사람들은 아직도 죄책감에 빠져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승객을 구조하던 사람은 극심한 가난과 병 그리고 학생이 내미는 손을 잡아주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가족들은 한이 맺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한은 온 국민의 한이고, 양심 있는 사람들의 한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신앙인의 한입니다. 우리는 그 한을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한은 보상금으로 절대 풀리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을 감옥에 구속하고 처벌한다고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나 보복으로 풀릴 수 있는 한이 아닙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한은 우리 사회공동체가 거듭나고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이 역사에서 부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인간의 생명과 인격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될 때, 억울한 죽음 앞에 부끄러운 마음을 회복할 때 풀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야만적인 이기심과 물신숭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희망의 꽃이 피게 되고 과거의 상처는 교훈과 역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을 열게 했습니다. 이미 죽은 이의 몸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무덤을 열게 하고 ‘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무덤은 과거의 흔적입니다. 희망이 갇혀져 있는 곳입니다. 기억이 갇혀져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제발 세월호 이야기를 그만 좀 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스스로 망각의 무덤에 머물자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의 무덤은 망각입니다. 잊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절규하는 한을 망각이라는 무덤 속에 가두려고 하는 모든 시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월호라고 하는 한의 무덤, 망각의 무덤에서 우리 자신을 나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칭칭 감아놓은 비정함과 개인주의를 풀어야 합니다. 공동체 의식과 형제애로 우리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합니다. 기억과 공감이 바로 그 출발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4월 17일 부활 4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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