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4일
김장환 엘리야 신부
하느님이 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의 주제어는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러 오신 예수님은 늘 길을 떠나시고 길 위에 계셨습니다. 1장부터 그랬습니다. 1: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10장에 들어서면 예수님이 걸으시는 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단지 전도를 위해서 떠나는 길이 아닙니다. 11장에서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데, 그 길은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의 죽음 대신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마르 10: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러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성마르코
예루살렘을 향해 비장한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께 한 청년이 달려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청년은 부자였습니다. 루가 복음을 보면, 유다의 지도자라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지니고도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온 보기 드문 청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대견하게 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년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빈 마음이 있었습니다. 삶에 만족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계명 중에 이웃관계에 관한 계명을 말씀하시자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합니다. 참 성실한 삶입니다. 청년을 유심히 보시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이 청년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십계명은 1-4계명까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5-10계명은 사람관계를 제시합니다. 두 주 전 들은 희년의 정신을 기억해 보십시오.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사람관계에서 행해야 하는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미슈파트와 쩨다카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말한 계명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시고자 함입니다.
청년은 율법의 본질이 되는 하느님 나라 원리-미슈파트 쩨다카는 무시하고 그저 율법 조문을 지키는 종교적 열심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가 종교적 열심히 율법을 지켜온 이유는 혹 불순종하여 저주받아 재산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적 열심의 배후에는 인간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청년은 언제나 불안하고 만족이 없었을 것입니다.
청년에게서 보는 부패한 마음은, 사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종교적인 열심은 보이지만, 탐욕을 만족시키는 우상을 섬기며 불의를 행하고 부패한 사회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향해 외칩니다. 7절,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12절, "너희가 나를 거슬러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는지, 나는 죄다 알고 있다. 죄없는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물리치는 자들아!“
아모스
심판을 경고합니다. 하지만, 그 경고는 구원을 위한 경고입니다. 15절,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성문 앞에서 법을 세워라. 그래야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일부 살아남은 요셉 가문을 불쌍히 보아주시리라.”
예수님이 청년에게 하신 말씀도 이 연장성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청년이 그토록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근본 동기가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를 바라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가진 능력이 이런 것입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입니다. 히브리 4: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말씀의 능력이 여러분에게도 강력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날마다 갖는 말씀 묵상을 통해서 여러분의 숨은 동기가 드러나고 자신의 실체를 정직하게 보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만, 그 말씀으로 인해 부자청년처럼 예수님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근심하며 떠나가는 청년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르코 10:23-25,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왜요? 이들의 삶이 재물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재물을 놓으면 인생이 다 무너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청년이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난 이유입니다. 인생의 뿌리가 재물이었습니다. 그 삶의 주인이 재물이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했지만 그 인생의 주인은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부자가 아니어도 재물을 쫓는 인생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1디모테오 6:9-10, “9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이 돈을 사랑하며 쫓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생의 뿌리가 재물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돈에 있고 돈이 주인 된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흔들리는 부초 같습니다. 이는 철저히 자기 욕망에 기반 한 것 이구요.
이런 인생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삶의 뿌리를 하느님께 두며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진정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삶이 영원한 생명의 본질입니다.
설교가로 유명했던 4세기 교부 성인 요한 크리쏘스톰의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포도주가 나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 과 부자는 다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부유한 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많은 사 람은 재물의 소유자가 아니고 관리자이고, 물질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부 유하다는 것은 재물을 많이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많이 나누어줄 수 있다는 의 미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을 장식하기 보다는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헐벗고 계신데, 아무 목적도, 쓸 모도 없이 집의 벽을 대리석으로 덧입혀 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 까? 집 자체가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집 들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확실히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영혼뿐 입니다. 우리는 살기위해 집을 짓는 것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짓는 것이 아닙 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넘어서는 것들은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여러 분의 필요보다 큰 집은 하늘로 가는 여러분의 발걸음에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을 볼 때에 여러분은 이방인이나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나라는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으십시오. 부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과 친구가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보 다도 부자가 될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그럼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을 갖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26절,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2장, 4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록을 보면 부자 청년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4:34-35, “34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35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습니까? 히브리서의 말씀이 답을 합니다. 4:14,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우상을 섬기며 쩨다카 미슈파트를 외면하며 살아온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유혹이 올 때나 신앙의 위기가 올 때 예배와 기도 가운데,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앞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4:16,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노랫말로 담은 찬양이 있습니다.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2)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우리가 매주 드리는 감사성찬예배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나가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나의 옛 자아의 실체를 깨닫습니다(조명). 나의 잘못된 생각과 마음, 그릇된 삶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정화). 성찬을 통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느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됩니다(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며 그 사랑 위에 서게 됩니다. 이럴 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도우시어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 분이 제시하신 삶의 원칙대로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생의 뿌리를 하느님이 아닌 것에 두고 살아가는 죄 된 삶을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어 하느님께 뿌리를 내리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오늘 성서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뿌리를 어디에 내리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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