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7일
사순 2주일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설교 말씀
사순절은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시간!
대한성공회는 2020년 9월 선교 130주년을 준비하며 “돌아봄-돌아옴”이라는 주제로 2019년 사순절 신앙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가 1919년 3.1만세운동에서 보여준 실천적이고 참여적인 신앙이 어떻게 개인주의적이고 기복적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었는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는 오늘 서신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의 뱃속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탄이 교회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이 이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들 - ‘가라지’라고 합니다 - 을 교회 안에 심어놓아 신앙을 오염시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얼마나 반 성경적인 것인지 모릅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배 후 여성 교인들이 모여 아파트 피가 얼마나 올랐는지를 자랑하고 그 정보를 나눕니다. 남성 교우들은 모이면 온통 정치얘기뿐입니다. 교회의 시대적 소명과 선교에 관한 고민과 대화, 기도는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상실한 채, 겉모양은 하느님을 예배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뱃속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나쁜 것의 전염은 빠릅니다. 선한 것을 지키는 것은 힘들기만 합니다.
지난주일, 예수님이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신 신명기 말씀을 통해 사순절에 회복해야 하는 성경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다.” – 모든 말씀, 구약이 말하는 성경의 가치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며 예배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삶이 가능합니다.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은 미슈파트와 쩨다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 –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어려움과 유혹을 겪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은 ‘돌아봄-돌아옴’ 시리즈 두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국교회의 신앙이 변질되고 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정체성의 상실에 있음을 알게 합니다. 정체성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그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소방관이 한 밤 중에 화재신고를 받아도 출동하지 않고 잠만 잔다면 화마 속에 사람은 죽고 건물은 쓰러지고 맙니다. 소방관이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참사입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을 몰라 세상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우리교회가 표어가 “세상의 빛”입니다. 미안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나의 안녕과 성공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습니다. 세상이 죽음의 그늘 밑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그 속에 사람들은 오직 자기 뱃속만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수치를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 한국 사회 전반에 이런 모습이 만연합니다. 한 단면이지만, 최근 뉴스에 보도되는 김학의 검사장으로 대표되는 별장 성접대 사건, 승리의 버닝 썬, 정준영 등의 연예인의 타락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여성은 그저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성적 노리개일 뿐입니다. SNS로 수치를 자랑합니다. 사람이 죽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돈과 권력으로 무마하고 은폐해 왔습니다. 얼마나 악마적인 세상입니까? 이것이 그들만의 책임일까요? 하느님은 누구의 책임이라고 할까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교회의 머리인신 예수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빛을 내야합니다. 생각나는 찬양이 있어서 불러 보겠습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주의 큰 이름 선포합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 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 지이다.”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바로 알 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기에,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일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루가 4:18-19,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죄인으로 취급받던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창녀들과 친구 되시어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초대하시고 권력자들의 비판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당대 지도자들에게는 불편하고 거슬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운동을 계승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요한을 참수형에 처한 헤로데 왕에게는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헤로데왕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렇게 겉으로는 염려하듯이 헤로데왕의 계획을 알려주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속셈은 아마도 예수의 사역을 멈추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어느 시대나 지배세력은 늘 한통속이 되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세력을 저지하고 막아내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당당하기만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32-33절,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쫒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 하고 전하여라.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없지 않겠느냐?”하고 말씀하셨다.
32절에서 언급하신 “마귀를 쫒아내며 병을 고쳐주고”라는 표현은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왕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는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당당하게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왕이신 예수님의 면모를 보게 됩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없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자기의 정체성을 ‘예언자’로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악한 왕과 가짜 예언자들의 동맹, 백성을 수탈하고 착취해서 자기들만 배부른 기득권 세력들을 목숨 걸고 비판했던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죽인 당대 권력자인 헤로데 안티파스를 향해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문학작품을 보면, 여우는 병아리를 헤치는 동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34절에 ‘병아리’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아, 헤로데가 당시 민중을 헤치는 악한 권력자임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표현인 것이죠. 예수님이 보시기에 헤롯은 그저 로마 권력에 빌붙어 자기 백성을 억압하는 교활한 인간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32절, “사흘 째 되는 날 내 일을 마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일을 마친다.”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33절에 나오는 예수님이 걸으셨던 “내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 3주일까지 드리는 성체후기도문에서 “하느님은 성자 예수를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과 경건한 삶의 모본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대신하는 죽음으로 희생제물이 되시어 세상과 하느님을 화해시키는 제사장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신 왕이며, 예언자이며, 제사장이십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삼중직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삼중직을 행하시며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그리스도의 삼중직으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늘 1독서의 아브람처럼 힘과 돈과 권력이 다스리는 제국의 피라미드 질서를 떠나,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져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이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등 사회 전반이 얼마나 반성경적인 피라미드 구조인지를 비판하고 저항하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 나라 백성들입니다.
왕 예언자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것은 생활 속 작은 것들을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지난 3월 6일 재의수요일 주보에 사순절을 나름 실하게 보내는 방법을 게재했습니다. 거기에 제시된 사항들을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말씀드리자면, 먼저 하느님을 대리하는 왕으로서 이 시대를 군림하는 물신과 맞서는 삶입니다. ‘평소보다 적은 생활비 혹은 용돈으로 살기, 필요한 물건 안사고 불편하게 지내기, 나의 존재에서 소유까지 ‘급진적 감사’를 드리기, 부자 되려 애쓰지 말고 그런 헛된 생각일랑 버리기(잠언 23:4)‘ 등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로 바로 서기 위해, ‘매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쓰기, 하루 세 번 기도하기(삼종기도 : 일어나서, 오후 중에, 잠자기 전)로 정의의 하느님의 마음(시편 7:11)을 품고, 사회적인 약자와 연대하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한 군데 더 정기후원 하기,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행동하기, 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세상을 화해시키는 제사장으로서, 이 시대는 가장 먼저 생태계를 회복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플라스틱 쓰지 않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쓰레기 문제는 대부분 플라스틱 사용의 폭증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의 1인의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은 98.2㎏으로 미국(97.7㎏)을 제치고 세계 1위였다.” 1인가구 급증, 편의점과 배달음식 성업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여러 실천사항이 제시되고 있으니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셔서 3월 6일 재의수요일 주보를 살펴보시고 한 주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삼중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의 정체성도 삼중직입니다. 하여 교회는 물신이 다스리는 세상에 맞서 자발적인 가난으로 나누고 섬기는 왕으로 존재합니다. 교회는 시대의 불의와 부패를 고발하며 하느님의 공평와 정의를 세워가는 예언자로 존재합니다. 교회는 갈라진 하느님과 세상, 사람과 사람들 연결하고 이어주는 피스 메이커인 제사장으로 존재합니다.
우리 대한성공회가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자기정체성으로 분명히 하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교회로 건강하게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에 우리 분당교회가 모범이 되는 하느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주보 1면에 있는 사순절 신앙운동 기도문을 읽으며 설교를 마칩니다.
“사랑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 한반도에 성공회 선교 130주년을 이루어 가심을 감사하나이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이 나라, 이 민족을 품고 기도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충실한 일꾼이 되고자 하였으나,
돌이켜 보건대, 한없이 미진하였음을 고백하나이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제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나태와 무관심, 반목과 분열 등 우리의 무수한 잘못을 회개하고
우리 안에 새겨진 상처에 온전한 치유함을 얻어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 가게 하소서.
나아가 이웃과 사회, 인류와 자연의
모든 연약한 것들을 돌보는 손길이 되게 하시고
겨레의 평화 통일과 인류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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