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31. 사순4주일, 서울교구 분당교회
여호 5:9-12 / 2고린 5:16-21 / 루가 15:1-3, 11하-32
설교/말씀 : 박동신 오네시모 주교 (부산교구)
하느님과 화해하고, 화 풀어야
지난 2월, 설날 지나면서 주교원에서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 양성과정, 평신도 리더 발굴과 교육, 특히 신학대학원들을 탐방했습니다. 이번 기간 중에 새롭게 마음에 들어온 표현이 있었는데, 디잎 처치(Deep Church)입니다. 마땅한 표현이 없어 우선 심교회(深敎會)라고 번역해보았습니다,
교우님들께서도 아시는 저명한 영국의 학자이며 작가인 C.S. 루이스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루이스가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선생님이 더 좋아 하는 교회의 형태는 어떤 것인가요? 고교회인가요, 저교회인가요?”
루이스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둘 다 아닙니다. 내가 선호하는 교회형태는 심교회입니다.”
"What style of church do you prefer? Are you high church or low church?" “I’m neither. I’m deep church.”
유머가 넘치면서도 참 멋진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이도 로우도 아닌 디잎 처치야 말로 우리가 마땅히 지향할 교회가 아닐까요?
사순절입니다. 더 은총 안으로 깊이 들어가고자 사순절 특강을 마련하신 줄 압니다.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시고, 부산교구를 사랑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세우고 계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해주려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우물가로 뭇 영혼을 안내하느라 성사의 깊이를 더하고, 영혼의 허기짐을 해결하려고 복음을 깊이 묵상하고,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 가운데 깊이 들어가는 심교회일 것입니다.
오늘 전례 독서인 여호수아, 고린토후서, 루가복음의 본문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찾아보았습니다.
이집트에서 400 여년 노예살이 했던 이스라엘은 출애급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습니다. 40년을 하루 같이 내리던 만나도 그 날로 이제 더 이상 내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길갈에서 비로소 할례를 행하여 이집트 400년 노예살이의 수치를 벗었습니다. 길갈에서 400년의 수치를 벗은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세리들, 손가락질 받는 여인들, 통칭하여 죄인들은 수치스러운 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식사자리에 초청하여 그들의 수치를 벗겨주십니다. 그런데 정작 당당하게 살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수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비유를 보면, 재산분할 받아 나갔던 둘째 아들은 수치를 딛고 아버지께, 아버지 집으로 귀향하므로 그 수치를 벗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아버지 집에 머물며, 아버지의 명을 따라 산 큰 아들은 정작 수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처지가 되었지요.
제가 여호수아의 말씀과 복음서를 통하여 수치, 부끄러움이라는 관점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 존재의 부끄러움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이래 우리를 힘들게 하는 불청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 나는 어떤 처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길갈은 어디인가요?
고린토교회에 사도 바우로는 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고린 5:19-20)
인간의 수치에서 시작한 질문의 답을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에서 얻은 셈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작품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 두 작품보다 복음을 명쾌하게 설명한 것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는 일본인 미쓰하라 유리가 쓴 ‘하얀 길’이라는 시입니다. 유시찬 신부님의 번역입니다.
“오랫동안 헤매이다
마침내 바른길 찾아오면
길은 아무 말 하지 않아
칭찬도 나무람도
짐 될까 저어
'돌아왔니' 한 마디조차
다만
지금부터 걸어갈 길
오롯이 하얗게 가리킬 뿐
걸어온 길보담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늘 중요하니까”
오늘 시편에도 서신에도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알려줍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하느님은 짐 될까봐 돌아왔니 한 마디조차 묻지 않는 하얀 길입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품어준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램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 아들- 이라는 작품입니다. 루가복음 15장 이 본문을 대할 때면, 램브란트의 이 작품보다 더 통쾌한 설교와 복음선포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에도 널리 알려져 친숙한 지금은 돌아가신 헨리 나웬 신부님은 고백하길, 자신은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아들의 원작품을 보기 위하여 러시아에 가서 샹트페테르부르크의 아르미타주박물관에 간다고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이 작품 앞에 서 있으니까, 박물관 봉사자가 편하게 앉아서 보라고 아예 의자를 갖다 주었답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램브란트의 이 그림 앞에 하루 종일 머물면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루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소개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오른 손은 어머니의 자상한 손 모양, 왼 손은 아버지의 투박한 손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반쯤 감은 눈을 통하여 우리의 죄와 잘못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왼발 신발을 벗은 채 아버지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께 용납되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잔뜩 화난 얼굴로 서 있는 첫째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아직도 모난 마음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전히 판단자로 보고 있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모습을 통하여 남을 판단하고 자기자신도 판단하는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너무 희미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하여 협조자 성령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소홀함을 보았을 수도 있지요.
교우님들은 루가복음 15장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램브란트의 이 작품 속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저는 두 가지를 함께 보고 싶습니다.
1) 화해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중심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는 이 말씀이 메아리가 되어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할 일이 얼마나 많을까요?
분당교회인데, 분당이라는 말이 분위기 좋은 성당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성가대의 연습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 분위기가 좋은 성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톰 라이트 주교님은 이 본문의 제목을 ‘돌아온 탕자 아들’도 되지만 ‘달려 나가는 아버지’라고 붙이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제안하셨습니다. 달려 나가는 아버지, 짐 될까 저어 '돌아왔니' 한 마디조차 하지 않는 하얀 길이신 하느님이 중심입니다.
돌아온 아들, 달려 나가는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중요합니다. ‘화해’입니다.
저스틴 웰비 대주교님의 우선순위 3 가지 가운데 하나가 화해입니다. 화해는 그 사람을 만나도 불편하지 않고 화가 치밀어 오지 않는 단계까지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화해는 일방관계가 아닌 쌍방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가족과 화해하십시오. 자기 자신과 화해하십시오.
화해는 깊이 간직된 차이와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서진 것을 하나로 모으거나 치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상되거나 파괴된 관계를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신뢰관계로 변모시키려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또 하나의 화해가 필요한 대상이 있습니다. 큰 아들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잔뜩 화가 났고, 아버지의 간청에도 동생환영잔치를 마다합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화해가 필요한 사람은 언제나 집에 머문 큰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권하는 대로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의 주제 그대로입니다. 화해는 어떤 등가가치를 지불하여 얻는 결과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기 때문입니다.”(2고린 5:19)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면 사람하고도 화해를 이룰 은총의 힘을 입게 됩니다.
2) 화를 푸십시오.
저는 전에는 둘째 아들 모습 속에서 제 자신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큰 아들 모습 속에서 제 자신이 비쳐져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28절을 보면, ‘큰 아들은 화가 나서’ 행동으로 표출합니다.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듣지 않고 따지고 투덜거렸습니다. 죽은 줄 알았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을 가리키는 말에도 나타납니다. 큰 아들은 자기 동생이라고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30절을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번역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32절에서 아버지는 “네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라고 하십니다.
정말 화가 많이 났습니다. 화 낼 법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달래셨어도 듣지 않고 거절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것이 비유 속의 큰 아들만의 모습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제 자신도 때때로 화가 나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자신에게도 화 난 것 같기도 합니다. 가끔은 하느님께 화 난 것 같기도 합니다. 때로는 동생에게처럼 타인에게 화 난 것 같기도 합니다.
주교는 잘못하면 신부님들에게 화가 나 있을 수 있습니다. 거꾸로 신부님들은 주교에게 화 나 있을 수 있지요.
화를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말하는 화해가 화목이 아니라 화의 바다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화가 해결되지 않으면 큰 아들처럼,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연 기쁜 날의 잔치에 참여하지도 않고 즐기지도 못하는 것입니다(32절).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를 32절에서 아버지의 입을 통해 하십니다. 아버지가 정말 가슴 아픈 일, 즉 예수님께서 정말 마음 아파하실 일은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날리는 것도 아니고, 큰 아들이 버릇없이 화를 낸 것도 아닙니다. “이 기쁜 날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성찬례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잔치, 기쁜 잔치입니다. 이 감사성찬례에서 큰 아들 같이 화 난 영혼은 팔짱을 낀 채 인상 쓰고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일은 지키지만, 기쁨에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아쉬운 일입니다. 악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기쁨이랍니다.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이 유머랍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입니다.
기쁜 교회가 깊은 교회입니다.
사순절의 올 해 주제는 선교 130주년을 지향하며 정한 ‘돌아봄, 돌아옴’ 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했는지 돌아봅시다. 내 자신과 화해했는지, 화 난 내가 아닌지 돌아봅시다. 자신을 돌아본 사람은 화해의 자리, 하느님께로 돌아옵니다. 돌아보는 공동체는 돌아옵니다. 이 성찰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이 성찰을 통하여 내 자신에게 비로소 내가 돌아옵니다.
이럴 때 복음의 기쁜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럴 때 감사성찬례의 기쁜 잔치에 돌아온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와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를 통한 화해의 잔치를 차리는 기쁜 교회가 디잎 처치, 심교회가 아닐런지요?
분당교회 안에 하느님께서 차려주시는 기쁜 잔치가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그 잔치에 더 이상 문밖에서 아버지랑 실랑이 하는 큰아들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비록 어제까지는 돼지우리를 치는 수모를 겪었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용납으로 기쁨의 눈물을 삼키며 잔치에서 기쁨의 잔을 드는 돌아온 아들들, 딸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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