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4일, 고난주일
대한성공회 공동설교문
* 루가 22:14-23:56 *
거기 너 있었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현장! 오늘 고난주일부터 시작되는 성주간의 전례는 우리를 그 때 그 곳으로 데려갑니다. 수난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를 되묻습니다.
종려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했던 백성들, 그들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고 외칩니다. 예수님을 내 온갖 문제의 해결사로 여겼다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하는 제 모습이 그 군중 가운데 있습니다.
대사제는 예수님께 신성모독의 죄목을 씌우려고 유대 최고회의(산헤드린) 의원들을 소집합니다. 어떤 이의 말이 내 입장과 다르면, 그 속뜻을 잘 살피지도 않고, 꼴통, 맹신자, 이단자, 빨갱이로 정죄하고 공격하는 일을 의롭게 여기던 제 모습이 그 의회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인가?” 물었던 빌라도는 답을 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빈정거리는 의도로 보입니다. 진리는 고상한 관념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한가로운 주제일 뿐, 현실의 돈과 권력 앞에서는 그다지 쓸데없는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는 나는 빌라도를 이해합니다. 고문을 하던 살육을 하던,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불가피하다면, 누구라도 악역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그건 개인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리고 손을 씻는 빌라도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의 총독쯤 되려면 그래야 당연합니다.
분위기를 잡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곧 분위기를 따라 구차한 부인과 변명을 하게 된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죽음이었을까요? 스승이요 주님으로 고백했던 스승 예수가 노예와 반역자들에게나 해당하는 십자가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신뢰와 충성을 다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정말 십자가의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일까, 내 믿음이 과연 죽음을 이길 수 있을 만큼 은총을 힘입고 있는 걸까, 내 헌신과 수고가 예수님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가, 종종 의심하고 자신 없어 하는 나는 베드로와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의 믿음이야말로 교회를 세울 반석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 연약한 믿음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시편 22편의 말씀을 외치며 예수님은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고백한 백부장의 밝은 눈이 부러울 뿐입니다.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참여하면서도 내 눈은 또 다른 신기한 기적을 찾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이 왜 필요할까요? 제가 늘 되묻고, 교우들께도 묻는 질문입니다. 세상은 신앙적인 가치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따라서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도 세상에서 돈 벌고 권력 얻고 이름 날리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이 그 돈과 권력과 명예의 일부를 신앙의 힘을 빌려 차지했다는 자랑이라면 도리어 황당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세상기준으로 자랑스러웠던 자신의 모든 것을 오물처럼 여긴다는 바울로의 고백을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필립 3:8)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돌아가셨습니다. 개인의 기복신앙과 생존본능에서부터 제국의 폭력과 구조 악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온갖 죄와 악이 주님의 십자가에 작용합니다. 세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절하고, 종교적 율법은 하느님의 은총을 훼방합니다. 배신과 고통과 모욕과 죽음의 쓴 잔을 피하지 않고 받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모든 죄는 숨길 수 없이 정체가 드러납니다.
동시에 그 죄를 해결하시려는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못과 창에 찔려 흐르는 주님의 피는 우리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시는 사랑과 희생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인간들이 서로 정죄하고 처벌하는 형틀인 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구원의 상징이 됩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착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할 때에야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서 주님을 따르겠노라 다짐할 수 있습니다. 그 일에 우리 믿음과 힘과 지혜가 모자람을 깨닫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게 됩니다. 오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 이제는 의로운 죄인임’을 확인합니다.
사순절기 동안 대한성공회는 모든 교회의 성직자와 교우들이 다함께 “치유 - 돌아봄, 돌아섬”의 신앙운동을 함께 해왔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세상 기준으로 성공하기 위한 길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실행하시는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이 이러하다고 이론을 주장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두가 참여하고 변화하며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돌아봄과 돌아섬’을 다짐하는 일은 심리적 위안과 교회 일의 보람을 더 얻자는 뜻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에 온전히 참여했는가를 돌아보자는 뜻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세상의 권세, 세상적인 가치와 논리와 방식으로부터 돌아서자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정말 신뢰하고 기뻐하고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실은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오해하고 박대하고 모욕하고 부인하고 못 박는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달을 때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기준과 능력이 됩니다. 수난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고 돌아설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
(‘성지고난주일’ 대한성공회 공동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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