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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주님의 새로운 일, 원형의 회복!

by 분당교회 2019. 4. 7.

2019년 4월 7일 사순 5주일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설교 말씀

 

주님의 새로운 일, 원형의 회복!

 

지난 주 중, 강풍으로 인한 화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웃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화마를 진압하느라 애쓰신 소방관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교회 선민이 아빠 아브라함교우님도요.

 

지난주에 브리핑이 있었듯이 우리 교회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결정을 한다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정을 위해 어떤 기준으로 어떤 과정을 갖는가가 그 공동체의 성숙도를 보여줍니다. 지체 한 분 한 분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뜻을 모아 가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는 더 성숙하게 됩니다. 

오늘은 먼저 설교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결정해야하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알파코스 11과 “하느님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다섯 개의 "C.S."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것은 상호 복합적입니다. 

 

1. 성경을 통한 명령(Commanding Scripture) - 보편적인 하느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일들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성령의 통제(Controlling Spirit) -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매우 개인적입니다. 신자가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십니다. 1) 그분은 종종 우리가 기도할 때 말씀하십니다. 2)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주심으로 말씀하십니다. 3) 하느님께서 때로 꿈이나 환상 등 특이한 방법으로 인도하시고 합니다. 

3. 상식(Common Sense) - 신약의 저자들은 자주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격려합니다.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제재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4. 성도들의 조언(Counsel of the saints) - 조언이 필요할 때 누구와 의논해야 할까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조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언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선택은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정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5. 상황적인 증거들(Circumstantial signs) - 모든 사건의 궁극적인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상황이나 자료들을 꼼꼼히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 그것을 가지고 좋은 것을 만들어 내실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우리가 가진 것을 그분께 드리고 성령님과 협력하면 말입니다. 잠언 16:9, “사람은 속으로 제 할 일을 계획해도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시는 분은 야훼시다.” 

 

우리가 더듬거리며 우리의 부분을 연주하면 - 읽고, 듣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기다리면서 그분의 뜻을 구하면, 하느님께서 오셔서 우리 곁에 앉으시며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하여 좋은 결과를 이룰 것‘입니다. 로마서 8: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하느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이사 43:19,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

 

하느님이 행하시는 새 일은 이미 돋는 싹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그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는 어떤 일을 보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제 2의 출애굽을 행하실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주시고자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행하시는 새 일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순종하며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럴 때 하느님을 경험하는 신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믿음의 눈을 가지고 우리 성공회 분당교회가 이런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행하시는 새 일은 무엇일까요? 지금 논의하고 있는 새로운 장소로 성당이 이전하는 일이 하느님이 행하시는 새 일 일까요? 오늘 1독서 이사야가 말하는 새 일은 이스라엘이 본토로 돌아가 다시 하느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이 행하시는 새 일이란, 하느님이 창조하신 존재로 회복되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당 이전 논의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 된다면 하느님이 행하시는 새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새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개개인을 창조의 원형으로 회복하시는 일입니다.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오늘 서신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서신 필립비서 3장 8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8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존귀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장 존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의 모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가장 존귀한 분이 예수였습니다. 예수님만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께 붓습니다. 유다의 반응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300데나리온, 1데나리온이 숙련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1년 치 연봉입니다. 약 3-4,000만원을 한 번에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대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지난주일 복음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나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한 마디도 책망하지 않습니다. 누추한 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안아주고 최고로 환대합니다. 아버지에게는 탕진한 재산보다 돌아온 아들이 가장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는 그 어떤 것을 드려도, 그를 향한 나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가 가장 존귀한 존재였기에, 1년 치 연봉에 달하는 향유를 한 순간에 쏟아 붓는 거룩한 낭비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주일에 드리는 예배의 시간이, 매일 묵상과 기도의 시간이, 주님의 몸인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 정성껏 드리는 봉헌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나눔과 섬김이,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의 표현이기에 아까운 소비가 아닙니다. 거룩한 낭비가 됩니다. 기쁨과 보람으로 돌아옵니다. 여러분이 그러시죠? 

 

가장 큰 거룩한 낭비를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를 위해 거룩한 낭비를 하신 하느님께, 사도 바울로처럼 고백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거룩한 낭비에 대해 비판하는 가롯 유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 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 

 

“장례 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다.”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그것은 예정된 것이었다.”(it was intended)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하느님의 경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장사되는 날을 위해서 그분의 몸을 준비시키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NIV성경은 “그녀가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 향수를 간직한 것은 예정된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은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성경이 날짜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의 죽는 날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열흘쯤 지나면, 예수는 하느님이 자신을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십자가에서 죽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나를 대신하여,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자 십자가에 죽으러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가시는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나자로의 집에 들르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죽은 오빠를 살려준 예수가 왔으니 환영 만찬을 차리는데 분주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마리아가 그 귀한 향유를 들고 와 예수님에게 부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는 길임을 알았을까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끝에 앉아 말씀을 경청했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마리아는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알았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 마지막 여정에 자기 집에 들른 주님의 복잡한 심경을 헤아린 것이죠. 

 

이유가 어떠하든, 마리아는 사랑하는 예수님께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드렸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예수에게 마리아의 위대한 헌신, 거룩한 낭비는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장례 일을 위한 것이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가장 존귀한 사람으로 여기고, 사도 바울로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삶의 목표가 바뀐 사람이, 주님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창조의 원형을 회복하는 구원의 목표입니다.

 

사순절이 28일이 지나고 12일 남았습니다. 다음 주일이 고난주일입니다. 그 다음 한 주간은 성주간입니다. 남은 사순절과 특별히 성주간에는 우리도 마리아처럼, 바울로처럼,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노래 한 곡이 생각났습니다.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의 ‘얼마나 아프실까’라는 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노래한 시입니다. 침묵 가운데 노래를 들으시며 기도합시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외아들을 제물로 삼으실 때 /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몸과 맘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어 제물 되실 때 /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가슴은

 독생자 주셨건만 

 인간들 부족하다고 원망할 때 /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심령은

 자신을 주셨건만

 사람들 부인하여 욕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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