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성삼위일체주일 설교/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저와 아내가 성공회에 온지가 벌써 28년이 되었습니다. 성공회 예배에 처음 참석했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기리에, 거룩하시다, 하느님의 어린양” 등 전례성가로 드리는 아름다운 예전이 참 좋았습니다. 그 때는 음원도 없어서, 성가를 구입해서는 집에서 자주 불렀었습니다. 당시에는 A곡조, B곡조만 있었는데 지금은 C곡조 D곡조까지 생겨서 예배가 더 풍성해졌습니다.
또 특이하다고 기억하는 것은 성찬례 중에 신앙고백을 드리는데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니케아신경을 노래로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후에 노래로 니케아신경을 고백합니다. 니케아신경은 C, D곡조가 없어서 A곡조로 드립니다.
니케아신경은 하느님에 대한 삼위일체 신앙고백문입니다.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채택된 고백문이어서 니케아신경이라고 합니다. 당시 ‘예수는 하느님에 의해 피조되었고 유한한 본성을 지녔다’는 아리우스 사제의 주장이 큰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이에 아타나시우스 부제가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 예수님을 반신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하느님과 사람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했다고 반박하였고 이러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니케아공의외에 받아 들여 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교리는 몇 몇 신학자들의 주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의 근원으로 한 분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유일신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경험하고, 하느님이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주님과 구원자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의문이 발생했습니다. “하느님이 two God로 존재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한 분 하느님을 믿는 것의 일부를 의미하는가?
곧 이어 오순절에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자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의문이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three God으로 존재하시는가? 그것이 아니면 성령을 믿는 것은 한 분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일부인가?”
이렇게 삼위일체 신앙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경험고 숙고하는 과정에서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의 형성 과정과 의미에 대해서는 주보 2면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느님은 완전한 사랑으로 온전한 일치를 이루십니다. 여기서 일치란 정태적 개념이 아닌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다’는 동태적 개념입니다.
최근에는 사랑으로 하나되는 삼위일체 지칭하는 용어로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침투하여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거하시어, 삼위가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 1서 4:16.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총의 선물도 사랑이고, 성령님이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빚어가는 열매도 사랑입니다.
삼위의 페리코레시스가 잘 표현된 그림이 루블레프의 이콘입니다. 주보 3면에 있는 이콘을 보면, 세 분이 한 상을 둘러 앉아 있습니다. 오른 쪽 이미지초상이 성령님인데 가운데 있는 초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입니다. 성자는 그림의 왼쪽에 있는 초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 분은 성부이십니다.
이렇게 세 분이 원을 그리며 앉아 있는데 그 원이 닫힌 원이 아닙니다. O자 아니라, C자입니다. 보는 사람을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초대합니다. 삼위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그 원을 완성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삼위일체 내부의 상호 관계를 특징짓는 공동체적 사랑과 긍정과 창조성이 삶의 일부가 되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상호 내재하는 삼위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넘치어 창조가 일어났습니다. 삼위 하느님은 흘러넘치는 사랑을 나눌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였습니다. 창세기 1:26,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사랑은 갈망이고 욕망입니다. 얼마 전 한국교회를 방문했던 신학자 새라 코클리는 하느님은 그들이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한 사람을 욕망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급진적인 사랑의 욕망이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욕망하시는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요한 3:16,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리고 협조자 성령으로 오시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요한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깊은 허무와 갈망은 사람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님, 한줌 흙에 지나지 않는 피조물이오나 감히 입술을 열어 당신에게 찬양을 드립니다. 당신에게 찬양을 드릴 때에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망름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기까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를 욕망하시는 삼위 하느님을 경험하고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은총의 통로는 예배와 기도입니다.
감사성찬예배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할 때,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과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자 성자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성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 순간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오늘 서신 로마 5장 5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로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예배 중에 이렇게 삼위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하나되어 온갖 영예와 영광을 영원토록 받으시나이다. 아멘”
우리가 기도할 때도 삼위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기도는 언어를 매개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이기 이전에, 연약한 인간 안에 있는 성령님을 통해 일어나는 신적 대화입니다. 로마서 8: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총으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나가 기도할 때, 성령의 기도 덕분에 삼위일체의 교제 안으로 들어 올려 집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양자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자의 영광을 나눠 받는 하느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개방할 때, 나 자신이 바로 “욕망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깊은 공허와 갈망으로 텅 빈 내면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삼위 하느님의 페리코레시스로 들어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성숙하게 됩니다. 루블로프의 이콘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인생이 진정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하여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요한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우리 삶에 예배와 기도가 삶의 우선 순위여야 하고 예배 기도를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삶을 충실히 살아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사도 바울로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고, 그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잠시 침묵 가운데 기도합시다. 여러분 자신을 성령님께 내맡기고, 하느님의 사랑에 여러분 자신을 개방하며 하느님의 임재를 기다리십시오.
이후 성찬예배 중에도 동일한 자세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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