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3일 연중 12주일
최성모 요한 사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은 연중 12주일입니다. 다시 연중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 성탄, 공현을 거쳐 주의 세례주일로 시작한 연중주일은 오랫동안 공현후 주일로도 지켜왔습니다. 이어지는 사순,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거쳐 지난 주 성삼위일체주일로 다시 시작된 연중절기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까지 이어집니다.
교우님들께서는 연중절기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보내시나요? 많은 분들이 연중절기를 그리 특별하지 않는 시간으로, 대림, 성탄, 공현, 사순, 부활, 승천, 성령강림의 절기와는 아주 사뭇 다르게 흘려 보내십니다. 하지만 연중절기도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절기와 다르지 않게 중요한 절기입니다. 주의 세례주일로부터 시작해서, 왕이신 그리스도주일로 마치게 되는 연중절기, 특별히 명명된 주일의 이름으로도 우리는 이 절기의 의미를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듯이, 우리는 주의 세례주일과 함께 그분의 공생애에 들어갑니다. 그렇습니다. 연중절기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절기입니다. 그분의 공생애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는 절기입니다. 그분의 곁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사역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고쳐나가는 절기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야 하겠지만, 사도들이 그랬듯, 우리 역시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소망이 바로 연중절기의 여정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제 말씀을 들으시니 어떠십니까? 연중절기, 아주 중요한 절기이지요? 와,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에 참여하고 있다니, 이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라니, 그저 막연하게 예수님과 함께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을 관통하는 하느님 나라 한가운데에 있다니, 생각할 수록 가슴이 떨립니다. 그럼 이제 오늘 복음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님의 공생애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사’라는 곳에 가셨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기록된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가신 이곳 이름이 서로 다르게 쓰여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게라사’, 마태오 복음서에는 ‘가다라’라고 말입니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르게 쓰여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의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수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 다음으로 쓰여진 마태오, 루가 복음서에는 ‘게라사’보다는 훨씬 더 갈릴래아 호수에 가까운 ‘가다라’와 ‘게르게사’로 고쳐 쓰여 있습니다. 이유를 가늠할 수 있으시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마귀들이 돼지떼에 들어가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돼지떼가 산비탈을 내달려 갈릴래아 호수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 있어야 하겠지요.
어찌 되었든 ‘게르게사’든, ‘게라사’든, ‘가다라’든, 이 지역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혹은 요르단강 건너편에 있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유다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죄의 땅이지요. 더욱이 예수님께서 뭍에 오르시자마자 맞닥뜨리신 것은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마귀에 들렸다는 것은 물론이고, 무덤 역시 유다인들에게 부정한 곳입니다(회칠한 무덤). 더욱이 그곳에는 유다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짐승인 돼지떼가 있습니다(굽이 두쪽이지만 새김질 하지 않는 돼지). 유다인들이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은 곳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가신 곳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단번에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 속의 마귀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지요. 원문으로는 로마군 6천명 정도의 큰 부대를 가르키는 ‘레기온’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이 ‘레기온’, 군대라고 소개하는 이 마귀들이 제발 자신들을 내버려두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이 마귀들로부터 고통당하고 있는 이방인 한 사람을 살리고자 작정하셨습니다. 결국 마귀들은 제 살길을 찾는다고 돼지떼 속으로 들어갔고, 미친 돼지떼들은 내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전했고, 마을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면서 죽은 돼지값을 내놓으라고 예수님께 따지기는커녕, 얼른 자기들 곁에서 떠나만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마귀로부터 헤어난 사람은 이제 사람답게 살게 되었지만, 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 그 사람을 마을로부터 쫓아내 무덤가에 살게 했던 마을 사람들은, 그저 돼지떼처럼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까 무서웠던 것입니다.
마을을 떠나시려는 예수님 앞으로, 구원받은 한 사람, 마귀로부터 헤어난 한 사람이 다가와 애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건져내준 예수님을 향한 아주 깊은 감사의 표시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오직 예수님과 함께할 때만이 자신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또 다른 마귀들이 다시 자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고 두려워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복잡한 모든 생각과 감정들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서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 구원받은 사람, 마귀로부터 헤어난 사람의 모습이 오늘 1독서인 열왕기상의 엘리야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오늘 말씀에서 엘리야의 모습은 처량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선왕들보다도 더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많이 한 아합왕과 그의 아내이자 바알신을 섬기는 이방인 여인 이세벨 여왕에 맞서 싸웠던 엘리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혈혈단신으로 가르멜 산 위에서 바알신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그들을 처단했던 엘리야와 같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오늘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전갈을 받고서 두려움에 떨면서 살기 위해 급히 도망칩니다. 거친 광야로 숨어 들어간 엘리야는 하느님께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기진맥진 했던지 그대로 잠에 든 엘리야는 하늘의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과 물을 두 번이나 먹고 마시고서야 기운을 차려 호렙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는 하느님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해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저버렸다고, 이제 하느님의 예언자는 자기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고, 그런 자기도 이제 죽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앞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지진, 불길은 마치 두려움으로 격양된 그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아주 조용하고 여린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담담히 엘리야가 해야 할 일들을 전합니다.
마귀에 들렸다 헤어난 사람도, 죽음의 위협 앞에 떨던 엘리야도 주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자기 나름의 절박하고 막중한 말들이 그들의 마음 속을 폭풍과 지진처럼 흔들었고, 불길처럼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주신 사람에게, 하느님은 살려달라 울부짖는 엘리야에게 그저 담담히 그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늘 바라는 것과는 달리, 오늘 주님은 그들에게 어떤 위로와 위안의 말씀을 건네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노력보다는, 나의 고통을 그분께 알리고, 나의 갈망을 그분께 드러내, 그분으로부터 위로와 위안을 얻고, 그분의 힘을 빌려 내 문제의 해소와 해결을 바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닙니까? ‘주님, 제가 말씀 드리려는 건 그게 아니잖아요. 주님, 제가 왜 무엇때문에 기도하는지 정말 모르시겠어요?’ 주님께서 내 마음을 몰라주신다,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지 않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2독서인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종이 아닌 벗으로, 주님의 귀한 딸과 아들로, 주님 안에서 모두 하나되었다는 이 복음을 뛰어넘는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한 위로와 위안이 어디 있고, 이보다 더 완벽한 해소와 해결의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받을 은총을 다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내 마음 속 폭풍과 지진, 불길 속에 계시지 않는 주님, 고요하고 잔잔한 물결처럼 우리에게 속삭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게르게사에서 그러셨듯,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러셨듯, 그 음성을 통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내가 네 필요와 바람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예비하였으니, 너는 내가 네게 맡긴 일을 하여라.’ 모든 것은 주님의 뜻 안에 있으니, 걱정말고 두려워 말고, 그분의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방법입니다.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방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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