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성선교주일입니다. 어제 여성사제 20주년 기념감사성찬례가 있었고 내일은 여성선교센타 축성 5주년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여성선교주일이 있는 이유는 평화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평화통일주일을 지키는 이유와 같습니다. 먼저는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 안에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이 남성과 평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보여주는 초대교회는 평등한 환대의 공동체였습니다. 갈라 3:28,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첫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보고 그 공동체에 속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도 2:47,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세속의 가치관에 오염되었고,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오늘 2독서에 그 모습이 보입니다. 야고보 2:3-4, 6, “3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2:1,9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9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계속해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죽은 믿음이라고, 차별하지 않는 것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17,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오늘 여성선교주일을 지키면서, 야고보가 비판했던 차별이 여성들에게 계속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우리 교회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환대의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기대에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공회분당교회는 교회위원과 신자사역 등 교회 리더십 10분 중에 여성이 절반으로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이 동등한, 아니 오히려 여성들이 더 주체적으로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서울교구의 최고 의결집행기관인 상임위원회를 보면, 주교님을 제외한 사제 7분, 신자 7분 총 14분의 상임위원 중에 여성은 단 한 명뿐입니다. 여전히 적지 않은 교회에서 결정하는 자리는 대다수 남성이 차지하고 몸으로 섬기는 봉사의 자리에는 대다수 여성들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평등한 지위와 역할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과 질서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여성이 심각하게 차별받는 사회입니다. 단적인 예가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입니다. 작년 통계를 보니까 남성 근로자의 임금 대비 여성근로자의 임금 수준은 67.7%입니다. 이는 남성들이 여성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남성들이 소득 10분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80.1%라고 합니다.
이런 여성의 지위와 소득의 불평등 못지않게 심각한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성을 향한 성적 비하와 성폭력입니다. 성폭력 사건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스컴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여성을 향한 성폭력은 교회 안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해서, 세계성공회 협의회 ACC는 “안전한 교회 만들기”를 이 시대 선교 과제로 제시했고, 이에 따라 대한성공회는 지난 7.8월 “성평등한 우리 교회”라는 주제로 여성 리더십 교육이 진행했었습니다. 이제 전교우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할 계획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느님께서 세상 속에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이유를 새겨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세상 속에서 그 나라를 일구어 가는 대조공동체, 대안공동체, 대항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먼저 성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성평등한 사회를 세워가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공회 선교정신 첫 번째 네 번째입니다. “1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4 불의한 사회를 변혁하고 모든 폭력에 반대합니다.”
양성 평등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1.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대상화하는 가치관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가 큽니다.
‘꿀벅지’ ‘하의 실종’ ‘된장녀’ ‘쭉쭉빵빵’ ‘S라인’ 등 이런 단어들이 인터넷이나 미디어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언어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들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여성을 차별하고 비하하는지, 점검해보며 언어를 바꿔봅시다.
출산 : 출생으로, 저출산-처출생
미망인 : 남편을 여윈 여성 – 고***의 부인
유모차 – 유아차
수유실 – 아기 쉼터
여성의 직업 앞에 ‘여’자를 사용하지 않기 – 여교수, 여배우, 여고
처녀라는 단어를 ‘첫’으로
자궁 – 포궁
몰래 카레라 – 불법 촬영
미혼 - 비혼
다음 주일 읽게 되는 서신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3:2,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2. 그런데 언어 사용은 생각과 연결되어 있기에 성경적 가치관으로 생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 생각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바른 언어 사용을 위해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생각은 성서가 보여주는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에 기반해야 합니다.
성서는 남녀 공히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등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창세 1:26,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그런데 창세기 2장 18절에서 여성을 ‘거들 짝’이라고 표현한 것을 잘못 이해해서 여성을 남성의 보조자 정도로 이해합니다. 개역성경으로는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래는 “비판하며 돕는다”는 뜻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함께 섬기며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동역자임을 명심합시다.
3. 교회는 자신들이 권리를 회복하는 여성들의 활동에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여성 리더십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시대적 문화와 가치관으로 인해 열두제자는 모두 남자로 소개되었지만, 적지 않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리더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바울로의 동역자들이 소개되는데, 가장 먼저 소개되는 사람이 페베입니다. 1절, “켄크레아 교회에서 봉사하는 여교우 페베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페베는 오늘로 치면 교회를 사목하는 여성사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3절에는 바울로의 동역자인 ‘브리스카와 아퀼라’를 소개하는데, 부인인 브리스카가 남편인 아퀼라보다 앞에 소개됩니다. 6절에 마리아, 7절에 유니아 등 많은 여자 제자들이 소개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으며 교회 선교의 주역으로 활동했는데, 시대가 흐를수록 퇴행하여 여자들의 권리는 약화되고 홀대 받게 되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똑똑하고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하는 여자들은 마녀라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성직을 비롯한 모든 리더십에 여성들은 배제당한 채,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20세기 중후반에 와서야 여성들의 참정권이 보장된 것(직접민주주의로 유명한 스위스도 1971년에야 비로서 여성참정권이 보장되었습니다)을 보면, 초대교회 이후 인류 전체가 얼마나 사탄적인 문화와 가치관에 매여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나와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띠로 지방에 살고 있는 시로페니키아의 출신의 여자라고 합니다. 띠로는 반 유대적 감정을 갖고 있던 이방지역으로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이방인의 땅, 어둠의 땅으로 불렸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역시 이방인 지역으로 마태복음서에서는 가나안 여자라고 표현하는데, 유다인들은 통상적으로 이방인을 가나안 사람이라는 적대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자는 이중적인 차별 가운데 살아 왔는데, 딸까지 아프니 가장 비천한 처지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이 만나십니다. 이 또한 유대의 정결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이 적대시 하는 이방 땅으로 가셔서 이방 여인을 만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차별을 만드는 경계를 뛰어넘는 용기가 선교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뜻밖의 반응을 하십니다. 27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빵은 오병이어 기적이야기에서 보았듯이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개는 이방인을 지칭하는 용어구요. 이방인은 하느님 나라를 누릴 수 없다는 당대 유다인들의 생각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폭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심은 빵을 나눠주는 것임이 그 다음에 전개된 대화를 통해 확인됩니다.
하지만, 빵은, 곧 하느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는 마태복음 12장 11절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인은 이 믿음을 시대의 가치관이나 관습을 뛰어넘는 희망과 용기로 표현합니다. 28, 그래도 그 여자는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하고 사정하였다.
20년 전 대한성공회에 여성 성직자 나온 것도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단 내 ‘젊은여성모임’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여성 성직이 주님의 뜻을 주장하며 시작되었고 이에 뜻을 함께 하는 남성들의 연대와 투쟁으로 이루어낸 것입니다.
이렇듯 양성평등은 여성들의 주체적인 투쟁과 뜻을 함께 하는 모든 선한 이들의 연대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응답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무의식중에 잘못 사용하고 있는 성차별 언어들을 의식적으로 바꿔가면서, 남녀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선교의 동역자임을 명심하며, 양성 평등한 교회와 사회를 이루는 일에 적극 헌신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양성 평등을 넘어서서 성평등한 공동체를 세워가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성평등한 사회로 만들어 가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환대의 영성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복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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