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고 기뻐하는 추석 연휴입니다. 고향에 가신 교우들, 여행 가신 교우들도 계신데, 가고 오는 길이 안전하고 무엇보다 코로나 감염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들녘의 벼들도 노랗게 익어가는 이 좋은 계절에 귀농한 친구가 보내온 글이 좋아 읽어드립니다.
“벼는 저 홀로 자라지 않는다.
아니 홀로 자랄 수 없다.
더불어 사는 운명을 받아서다.
벼는 작은 볕에서 자신을 익힌다.
영글수록 고개를 숙인다.
자신을 익힐수록 서로 기대고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내 준다.
서로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벼는 가을 들녘에 서서 맨몸으로 태풍에 맞선다.
두려움 없이 맞선다.
모두가 온전히 살아가는 세상, 그 넓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치열하게 키운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을 내 준다.
가을 들녘이 성스러운 이유다!”
추석 연휴가 아름다운 주님의 피조 세계를 묵상하시며 주님의 은총을 헤아려 보는 거룩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0.
마르코복음 전체는 ‘길’로 시작하는 ‘길의 복음’입니다. 마르코 1:3,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특별히 지난주일 복음 8잘 27절부터 10장 52절까지를 ‘길’ 단락으로 분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의 가이샤리아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까지 200Km의 긴 여정을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메시아의 본분과 그를 따르는 제자도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31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복음을 기억하시나요?
예루살렘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첫 번째 수난예고를 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 자’라는 뜻의 헬라어로 히브리어 메시아도 같은 뜻의 말입니다. 유다인들은 정치적 군사적인 메시아가 와서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고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혁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할 것이라니까 펄쩍 뛴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34,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십자가의 영성이 제자도입니다.
엿새 후,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자신의 수난 예고로 실망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본래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시며,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9: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들어라’는 말은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는 예수님만이 주님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막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산에서 내려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와 보니, 다른 제자들이 큰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사람들이 악령 들린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고 쩔쩔 맸나 봅니다. 능력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된 것 같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못돼 조롱받는 한국교회의 모습과 같습니다.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하실 수만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9:23,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아멘이십니까? 주님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응답하시고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아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왜 저희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왜,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세속의 가치관을 이기며 살지 못합니까?”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9:29,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도가 없이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거룩의 능력, 사랑의 능력이 없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돼버리는 것입니다. 기도가 생명입니다.
필립보의 가리사리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은 갈릴래아를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꿈꾸는 메시야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묻기조차 두려워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후 베드로가 한 행동에 ‘사탄아 물러가라’며 호통 치시는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듣고도 가파르나움으로 오는 길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지를 두고 다투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길은 세상을 구워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길과 제자들의 길이 다르기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12제자를 불러 가르치십니다. 9:35,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과 전혀 다른 가치와 질서의 나라입니다. 세상은 피라미드 체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피라미드 체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이 말씀을 묵상하며, 어린이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
먼저는 교회 안에 있는 어린이들이 생각났습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 갓 태어난 어린 아이도 있습니다. 아직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영적인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어리면 이해력이 부족합니다. 영적인 공동체인 교회의 제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 생각이 아니면 떼를 쓰는 어린 아이들처럼 영적인 어린이들은 생각이 세상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배척하고 방해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어린이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어리게 생각하고 엉뚱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영적인 어린이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서신에도 영적인 어린이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야고 3:14,16, 14 여러분은 마음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품고 있으니 공연히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영접한다 시인한다 사랑으로 대접한다’는 의미입니다.
섬김이란 이런 어린이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어리냐고 판단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악들이며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 주며 성장해 가도록 돌보아 주는 것이 섬김입니다.
하지만 섬김이 쉽지 않습니다. 내 힘과 의지로는 쉽게 절망하게 됩니다. 어떻게 주님의 말씀대로 섬길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되 ‘내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지난주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불쑥 던지셨던 질문이 있습니다. 마르코 8:29,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질문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의 인생에 예수는 뭐냐?”는 두 가지의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정구 신부님이 한 주간의 화두로 주신 질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를 본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죄 곧 나’인 자신의 실체를 보는 순간, 죄와 죽음에서 나를 구원할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고백을 드릴 때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차오르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존귀하게 여기는 ‘어린이 하나’, 한 존재를 섬기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주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섬기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어린이를 환대하라는 말씀의 두 번째 메시지는 어린이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를 환대하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사람의 상징으로 어린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6세 이전의 어린이는 여인과 더불어 토라를 배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의 가치가 토라를 알고 그것을 지켰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결정되었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여인과 어린아이들은 근원적으로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어린이는 나이가 어리다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약한, 남의 돌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렇게 낮은 사람을 환대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환대와 섬김은 구체적입니다. 즉 물질과 시간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물질과 시간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처럼, 조건없는 섬김으로 낮은 자를 환대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환대의 영성입니다.
성공회 분당교회는 ‘환대의 영성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복음공동체’가 되고자 분기별로 노숙인 무료급식을 섬기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이 3/4분기 섬김의 날인데, 교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가운데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관구는 미얀마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환대의 자리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성가수도원 프리스카 수녀님이 미얀마에서 수녀원을 개척하고자 계신데, 그 분을 통해서 미얀마의 가난 사람들을 돌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전해 주셨고 주교원은 이를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관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봉헌하는 9월 동안 3600만원을 모급하기로 했습니다.
한 달에 3만원씩 100가정을 1년 동안 돕기 위해서 3,600만원이 필요합니다. 주보 2면에 관계 자료를 올려 놓았으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저는 여러분에게 코로나 지원금의 십일조를 봉헌하자고 제안 드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 온전한 십일조와 선교구제헌금을 드리는 주님의 제자로 성장해야 성공회 분당교회가 환대의 영성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복음공동체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필립보 가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에서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섬기는 자들이 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 말씀들은 우리들을 향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그 말씀들을 마음에 새길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살아내는 제자로 세워주실 것이빈다.
8:34,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9: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9:23,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9:29,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
9:35,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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