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성당으로 오면서 예배가 나의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려 왔습니다. 교회력을 따라 가장 존귀하신 분 예수님의 삶을 기념하면서, 여러 지향에 따른 예배를 드리는데, 자칫 세속의 가치관과 자기 욕망에 매몰되어 방향 없이 살다가 후회할 수 있는 인생을, 보다 존귀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예배다 생각하니, 매 주일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지난 주일에는 모든 한국인 순교자의 날로 오늘은 한국교회 희년실천주일로 예배드립니다. 희년실천주일은 “희년함께”라는 기독교 시민단체가 한국교회에 제안하여 추석 전후에 지키는 예배입니다.
희년이란 오늘 1독서로 읽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제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7번의 안식년 그 다음 해를 희년으로 지키면서, 경제적인 곤경 때문에 자기 땅을 남에게 팔았거나, 그래도 살기 힘들어 남의 집에 종이 되었어도,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오고, 노예도 자유인이 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희년이 시작되는 날이 7월 10일인데, 이 날은 이스라엘이 대속죄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대속죄일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리며 모든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범한 죄를 용서받는 날입니다.
대속죄일에 땅과 몸의 자유가 회복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해방과 사회경제적인 해방을 동시에 이루는 총제적인 것임을 알게 해 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해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신 출사표와 같은 것인데, 17절에 나오는 “은총의 해”가 바로 희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희년을 이루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죄로부터의 해방, 가난한 자를 자유하게 하는 사회경제적인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워진 초대교회를 보면, 총체적인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2독서입니다. 사도 4:34-35, “34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35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희년의 구성요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50년 되는 희년에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돌려주기’입니다. 땅과 집을 아무 조건 없이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르기”입니다. 희년을 기준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토지를 팔게 되거나 노예가 되면 가까운 친척이 와서 대신 그 값을 지불하고 되사오는 것입니다.
이 ‘무르기’를 Redemption 구속이라고 하고, 무르기를 해 주는 친척을 ‘고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구속하셨다는 이해가 희년에서 온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고엘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런 희년 제도의 근본이 되는 말씀은 오늘 1독서 레위기 25장 23절에 나오는 “땅은 내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5장 55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나의 종, 내가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나의 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성서는 모든 땅이 하느님의 것이니 사적 소유를 금합니다. 일시적으로 하느님이 주신 땅을 팔 수 있지만, 가난이 이유겠지요. 50년마다 원래 하느님이 사용하도록 주신 사람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종이기 때문에 사람끼리 서로 종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으로 노예가 될 수 있지만, 역시 가난이 이유입니다. 50년마다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도로 만들어 낸 것이 희년입니다.
이처럼 희년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인간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고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제도가 역사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기록은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희년은 실제적으로는 시행되지 않는 이상적인 법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희년 정신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살아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이야기’가 그 예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옆에 아합 왕의 별궁을 세워졌는데,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정원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나봇에게 더 좋은 포도원을 마련해 주겠다고, 원한다면 좋은 가격으로 사서 현금으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내가 가진 땅 옆에 도로가 개설되고, 대규모 택지가 들어와 토지가격이 올라가면 떼돈을 벌게 되었다고 축복받았다고 생각할 텐데, 나봇은 거절합니다. 열왕상 21:3,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이 포도원을 임금님께 드릴 수 잆습니다.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은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희년정신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룻기에는 “무르기” 사례가 나옵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이 기근이 들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 뒤 두 아들은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살았지만, 자식을 보지 못한 채 두 아들도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 여자 세 명만 남았으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이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귀향을 결심하고 두 며느리를 불렀습니다. 두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입니다. 시모는 며느리들에게 ‘너희는 아직 젊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으라’고 강권했습니다.
이에 오르바는 고향으로 떠나갔지만, 둘째 룻은 고집스럽게 나오미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추수하는 남의 밭에 가서 이삭줍기를 하는 것 말고는 먹고 살아갈 호구지책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삭줍기는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하신 명령이었습니다. 레위기 19:9-10, “9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마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마라. 10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놓아라.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과부와 고아, 떠돌이, 외국인 등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편드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마침 룻이 이삭줍기를 하러 간 밭이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 이삭을 주스러 온 룻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시모 나오미가 룻에게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목욕을 하고 타작마당에 있는 보아스의 잠자리에 몰래 들어가 누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대로 룻이 보아스의 잠자리에 몰래 누웠는데, 보아스가 깜짝 놀라 "'너는 웬 여자냐?'(3:9)하고 물었습니다. '비녀는 룻입니다.'하고 룻이 대답했습니다. 룻이 계속해서 말하기를 '어르신네께서는 이 몸을 맡아주실 분이십니다. 그 옷자락으로 저의 몸을 덮어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희년 정신에 따라 룻은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 ‘고엘’의 의무를 행하도록 호소했고 보아스는 고엘의 의무를 수행하여 나오미의 밭을 사주고 며느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들은 나오미의 아들이 되었는데,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되는 오벳입니다.
오늘 오후에 룻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엘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에 무르기를 행하게 하는 희년의 정신이 살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34장을 보면,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을 침공해 왔을 때 시드키야 왕이 예루살렘 온 시민에게 노예를 다 풀어주겠다는 결의를 시킵니다. 그래서 고관과 백성들이 남녀종을 있는 대로 다 풀어주며 다시는 종으로 부리지 않은 것을 결의하고 그 결의대로 모두들 종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구약 곳곳에 희년정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50년마다 “돌려주기”를 시행한 흔적은 없지만, 땅의 하느님의 것, 사람도 하느님의 것이라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있었고 희년의 정신이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듯 희년은 이스라엘 역사에 살아 있는 제도였습니다.
요즘 대장동 개발, 화천대유 사건으로 떠들썩합니다. 야당은 ‘화천대유의 주인은 이재명이다’ 주장하고 여당은 ‘국민의힘 게이트’라고 주장하며 정치적인 공방이 치열합니다. 경찰과 검찰 등의 조사를 통해서 특혜나 비리가 드러난다면 그것에 연루된 사람은 누구든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각자 생각에 따라 야당 주장을 지지 하거나 여당 주장을 지지하실 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주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대장동 개발 사건은 하느님의 것인 땅을 이용해서 막대한 불로소득을 갈취해가는 토건 세력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비호해주는 불의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토지 정의, 희년의 정신으로 경제정의와 사회정의를 주장해온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해 왔던 것입니다. “시장 친화적 토지공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불로소득에 과세하고 노력소득에 면세하는 패키지형 세제개혁과 토지공공임대제를 시행함으로써 하느님의 토지법으로 정의를 이룩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노동의 산물은 보장해 주며, 토지에서 나는 이익은 모두가 함께 나누는 방식을 취하여 토지에 대한 모두의 권리를 보장하는 가장 유효적절한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나라에 성경적 토지정의, 희년정신에 입각한 사회정의를 세워주실 때를 허락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적 토지 정의에 입각한 바른 정책이 마련되도록 더욱 기도하고 외쳐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 이스라엘 역사에서 희년 정신을 기억하고 실천했던 하느님 나라의 백성과 같은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고엘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보아스처럼, 초대교회를 고엘의 공동체로 세워갔던 바르나바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의 고엘이 되어주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여 성공회분당교회가 탐욕과 불법이 난무하는 이 시대 이 땅 가운데 희년을 선포하며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주님의 교회로 우뚝 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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