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일도 연휴중이네요. 잘 쉬고 계시지요? 깊어 가는 가을, 시월의 단상입니다.
“선조들은 시월을 으뜸이 되는 달이라고 상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월에는 한뼘 햇볕도 바람 한 자락도 땀 한 방울도 그냥 두지 말라하셨습니다. 시월은 그간 수고한 모든 것을 열매로 익히는 거룩한 공정에 치열하기만 합니다. 콩 한 알, 밤 한 톨, 도토리 한 알, 나락 한 개 모두가 하늘 땅 사람의 결정체입니다. 이토 록 시월은 엄중합니다. 다만 탐욕에 일그러진 영혼, 무지한 인간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성찬예배를 드리며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길을 떠나십니다. 이 길은 필립보 가이사리아에서 출발해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이 사람을 다른 복음에서는 부자 청년, 부자 관원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하는 6가지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첫째 계명부터 4번째 계명까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나머지 여섯 개는 사람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부자 청년이 자신은 어려서부터 이 계명들을 다 지켜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시며 대견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의 어떤 점이 대견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 중에 ‘남을 속이지 말라’는 계명은 영어로 ‘do not defraud’, ‘남을 속여 빼앗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탐욕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속여 빼앗는 것’은 구조적으로 은밀하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임금을 체불하거나 계약 이상으로 노동을 요구하는 등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 합법을 가장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합법이라고?” 직원 월급 300씩 떼먹고 20억을 챙긴 방법“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느 청년이 10년 전 용역업체를 통해서 은행경비원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점장 차를 세차하고 은행원들의 책상을 정리해 주고 고장 난 ATM을 수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는데 이중 모든 일이 경비원의 업무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한 지 1년이 지나 가깝게 지내던 은행 서무 담당자가 그 청년에게 ”돈 벌어서 어디다 쓰길래 맨날 돈이 없다 그래?“라고 물었고 청년은 월급이 100만원 조금 넘는다고 답했더니 서무 담당자가 깜짝 놀라 했습니다. 은행에서는 매달 경비원 인건비로 240만원씩 용역업체에 주고 있는데 청년이 받은 월급은 세후 132민원, 용역업체를 거치면서 132만원으로 줄었던 것입니다.
2018년 한국서부발전에서 산재로 사망한 故김용균 청년도 똑같은 방식으로 임금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원청이 지급한 노무비는 522만원이었는데, 그가 사망하기 직전 받은 월급명세서를 보면 211만원이었다고 합니다. 하청업체를 거치면서 311만원이 사라진 것입니다.
조사 결과 용역업체들이 원청에서 받은 인건비 중 실제 노동자에게 준 돈은 3-25%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많게는 97%까지 노무관리비의 명목으로 중간에서 가로챘다는 말입니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용역업체는 식대, 교통비, 연차수당 등 각종 수당을 없애고 1년마다 근로 계약을 새로 맺으면서 많은 노동자들을 저임금에 가둬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최저임금만 지급하면 합법으로 인정받고 처벌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청구조로 인한 비정규직 채용이 이러한 저임금의 구조적인 원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정규직 철페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속여 빼앗아 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것입니다. 오랜 전 카트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랜드 홈에버에서 일하는 워킹 맘들이 본사가 하청업체와 간접고용 계약을 시행하고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량해고 한다는 소식에 파업을 일으킨 실화가 영화 소재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가 속한 그룹의 회장은 1년에 십일조만 100억 정도를 봉헌하시는 대형교회 장로였다고 합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은 더 열악하기만 합니다. 불법체류자라고 임금을 체불하거나 인권조차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자들을 저주하십니다. 오늘 1독서입니다. 아모스 5:7 “7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5:10-11, “10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가는구나. 너희는 돌을 다듬어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탐스럽게 가꾸고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하느님께서 그들의 아우성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5:4,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챘습니다.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또 추수한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do not defraud’, ‘남을 속여 빼앗지 말라’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하신 것 같습니다. ‘네가 소유하고 있는 그 재산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형성된 것인가’를 물으시는 것이죠.
청년은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착취를 통해서 부를 모으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에서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는 부자 청년을 보니 대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 끓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묻는 부자 청년의 진정성을 보신 겁니다.
그렇게 대견해 하시면서 유심히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진 것”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어로, ‘크레마타‘, ’토지‘를 말합니다. 부자 청년이 토지가 많았나 봅니다. 토지가 많다는 것은 희년법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희년법? 지난 주일 설교를 다시 들으시길!
청년이 남을 착취해서 돈을 모은 것도 아니고 율법에 따라 자선도 베풀었을 것이니 주님 보시기에 대견한 신앙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했습니다. 묵상의 단편을 나눕니다.
모든 인생은 그가 하느님을 인정하든 부인하든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인생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환대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픈 내적 열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절제하고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며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주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 청년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하지만, 자칫 엄격하고 자책하기도 하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만족되지 않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이유인즉 구원, 영원한 생명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내는 성과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를 벗어나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에게 주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구원받은 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노력이 대견하지만, 그런 삶은 자신의 만족과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삼고,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과 세상의 재물에 안정감의 기반을 두고 있는 삶이기에, 이제는 복음 29절(“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의 말씀대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한 삶으로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인생의 비전으로 품으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만을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부자 청년처럼 주님 앞에 나와 계십니다. 주님께서 대견하게 바로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살아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나와 동행하자!”
이런 삶을 위해 주님 앞에 나가 무릎 끓고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지금 내게 부족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실 겁니다. 다만, 주님 말씀하실 때,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순종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순종은 우리 몫이지만,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며 서신 말씀 읽어 드립니다. 히브 4:14-16, “14 ¶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15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16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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